영어수업을 하다 보면 많은 반을 들어간다. 우리 반 수업은 대체로 편하다. 담임이 영어 수업을 하니아이들의 수업태도가 좋은 편이다. 그러나 우리 반 아이들 입장에선 하루 종일 담임을 봐야 하는 나름의 고충이 있다.
조회 시간, 점심시간 임장 지도, 종례 시간, 그리고 담임선생님의 영어 수업까지 있는 날은 우리 반 아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담임이 꼭 '빅부라더'같다나?인간 CCTV냐며 수업시간에 '프리덤~'을 외치는 아이들도 있다.녀석들...
다른 반 수업은 반마다 성향이 각양각색이다. 어떤 반은 수업 진도 나갈 땐 집중을 안 하면서 내가 재미있는 썰을 풀 때면 "크하하~" 신나게 웃어대는 똥꼬발랄한 반도 있고, 어떤 반은 내가 어떻게든 광대가 되어 웃겨보려 애쓰지만 반 전체가 침울한 반이 있다. 경험상 담임선생님과 그 반 아이들의 성향은 조금씩 닮아가는 것 같긴 하다.
내 입장에선 우리 반보다 타반 수업이 더 많이 신경 쓰인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내 새끼'라는 마음이 들어 쉬는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일이 생기면 수시로 반으로 가서 아이들을 케어한다. 우리 반 키 큰 녀석이 옆반 조그마한 아이한테 처맞고 코피흘린다는소식이라도 들리면 바로 달려가서코피 터진 우리 반 아이 손을 잡고 옆반으로 향한다.
그런데 여기서 난감한 점은 아이들끼리의 싸움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얼른 중재하고 화해시키면 되지만 상대편 아이의 담임 선생님까지 관여하게 되면 일이 묘하게 흘러간다.
때린 아이의 담임도 자신의 반 아이에대해선 부모 같은 마음이 되나 보다. 그때부턴 담임선생들끼리의신경전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A반에서 영어 수업을 할 때 2주째 교재를 안 가져오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책을 깜빡하더라도 미리 다른 반에서 책을 빌리면 되는데 요 녀석은 책상에 아무것도 없이 멀뚱멀뚱 앉아만 있다.(*지금부터 이 아이를 김종철이라고 부르겠다. 물론 김종철은 가명이다)
처음엔 종철이를 교무실로 따로 불러 손에 사탕도 쥐어주며 좋게 타일렀다.
ㅡ 종철아, 책을 자꾸 깜빡하면 옆반에서라도 빌리렴. 그래야 수업내용을 이해하지.
그러고 다음 영어 수업시간.
종철이는 여전히 교재 없이 빈책상으로 멀뚱히 앉아 있었다. 계속 이러다가는 중간고사까지 책 한번 못 보고 시험 보겠다 싶어 종철이를 교무실로 다시 불렀다. 이번엔 지난번보다는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으로.
ㅡ 이자까야 : 종철아, 선생님이 지난번에도 이야기했는데 수업 태도가 너무 안 좋은 거 아니니?
수업시간에 교재 안 가지고 오거나 수업태도 안 좋으면 벌점 5점받는데, 선생님이 종철이 믿어보려고 지금까지 벌점을한 번도 안 줬어. 지금까지 교재 안 가지고 온 것만으로도 합산하면 벌점이 총 35점이야! 너 정말 이럴래?!
ㅡ종철이 : 선생님! 책 살 돈이 없는데 그럼 어떡해요?!
나는 예상치도 못한 그 아이의 말에 뭐라고 제대로 야단도 못 치고 종철이를 그냥 교실로 올려 보냈다.
그날 점심시간.
종철이의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종철이가 '가난이 죄냐'며 자신에게 토로했단다. 그래서 내가 종철이에게 사과를 해줬으면 하고 요청하셨다.
종철이 사정을 몰랐던 게 너무 미안했다. 종철이에게 간식을 챙겨주며 사과했다.
ㅡ종철아, 샘이 네 상황을 미처 몰랐구나 ~ 미안하다~
종철이는 괜찮다며 쿨하게 내 사과를 받아줬다.
문제는 그날 하굣길.
아이들이 하교하는 루트와 내가 가는 방향도 어느 정도까지는 같다.
우리 반 종례를 하고 잔무처리를 얼른 끝낸후 학교정문을 나와 퇴근하는 길이었다. 저만치 눈에 익은 학생 한 명이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잠시 후 그 아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종철이"는 편의점 옆 골목에서 말보로 담배 한 보루와 한 손엔 담배를 들고 맛나게 피우고 있었다!
저놈의 시기가 책살 돈은 없다면서 눈물 그렁이더니, 담임선생님도 속이고, 나도 속이고, 게다가 외제 담배?!
"야! 인마!!!! "
단전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의 사자후에 맛나게 담배 피우던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종철이의 손가락 사이에서 태우던 담배만이 바람에 조금씩 타들어갔다.
다음날 A반 수업.
종철이 책상엔 내가 그렇게 갖고 오라던 영어교재가반듯하게 펼쳐져있었다. 그리고 종철이는 모범생으로 빙의한 듯한 미소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