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학생 한 명이 한껏 불쌍하고 슬픈 표정을 얼굴에 ‘장착’한 채 교무실 내 자리로 다가왔다,
“선생님....저...”
아이의 그 다음 말은 더 안 들어봐도 안다.
"쿨러~럭 쿨럭 쿨럭~"
안 나오는 기침까지 억지로 만들어 내고 있는 이 아이의 몸짓만 봐도 ‘나는 오늘 학교를 꼭 조퇴를 하고 말겠소~’는 의지표명이 강력하게 느껴진다. (이 녀석은..한 시간 전만 해도 친구들과 매점에서 빵 사먹으며 떠들고 있었는데 내가 그 모습을 목격한 걸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기력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뛰어났다! 순간 이 녀석의 학생부 진로 희망란에 자신이 희망하는 ‘국어교사’가 아니라 ‘연기자’라고 써줄까라는 고민을 잠시 해 보았다.)
아이들은 조퇴를 하기위해 최선을 다해 내면연기를 시도한다.
이 아이를 포함하여 조퇴를 하겠다는 아이들이 이번 주에만 해도 벌써 6명 째다. ‘일단 수업 받아보다가 너무 아프면 학교 보건실에서 좀 쉬는 게 어떻겠니?’ 라든가 또는 ‘너 지금 거짓말 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 수업 빠지려는 생각은 어림도 없어!’ 라고 말해도 학생이 끝가지 조퇴하겠다고 우기면 담임선생님이라도 별 수 없다. 게다가 요즘은 학부모님들은 예전처럼 아이들 생활교육에 엄격하지 않아 대부분은 내 아이가 원하는 대로 처리 해 달라고 담임교사에게 요청하는 실정이라 ‘조퇴 땡깡’을 부리는 아이를 야단치는 일이 많이 힘들어졌다. (아이들의 학교생활 지도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개근상이 존재했던 몇 년 전만 해도 학생들은 개근상을 타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많이 했었다. 특히 고등학교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개근을 한다는 것은 그 학생의 성실도를 반영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학업 우수상과 같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전유물인 교과 관련 상장들과는 다르게 개근상은 성적과 상관없이 학교를 부지런히 나오기만 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상장이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확실히 요즘 아이들은‘개근’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 게다가 각 고등학교 (특히 여자고등학교나 남녀공학 고등학교)에서 학교 축제가 많은 10월 한 달 동안은 조퇴를 시도하는 학생들이 유독 많다.
다양한 조퇴 테크닉
담임 선생님에게 시도하는 ‘학생들의 조퇴 기법’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요즘엔 SNS의 발달로 어떻게 하면 학교 조퇴를 쉽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도 많이들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클래식한 감기(with 고도의 연기력)
가장 일반적인 조퇴 이유로는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하면서 교무실에 들어와서는 담임 얼굴에다 헛기침을 마구 해댄다. 이 방법은 가장 ‘클래식한’ 방법으로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학생이 아니라면 꾀병의 정체가 쉽게 들통 나는 단점이 있다.
고열 (with 핫팩)
두 번째 방법으로는 학생들이 주로 겨울에 애용하는 방법인데 ‘휴대용 핫팩’을 이마에 오랫동안 대고 나서 열이 많이 나고 아프다며 담임에게 호소하는 방법이다. 핫팩을 한동안 이마에 대고 있으면 이마가 뜨끈뜨끈해지고, 더워서 이마에 땀도 좀 나게 되므로 아파서 식은땀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 여기에 ‘약간의 애처로운 표정’을 첨가하면 웬만한 담임 선생님들은 조퇴증을 끊어 주고 만다. 가끔 핫 팩을 준비하지 않은 학생들 중에는 친구에게 자신의 이마를 세게 때려 달라고 요청하여 이마를 몇 대 맞은 후 조퇴를 시도 하는 무리수를 두는 학생들도 있다.
눈병(a.k.a 법이 허락한 질병)
다음 방법으로는 ‘눈병’인데 눈을 오랫동안 감지 않고 부릅뜨고 있다가 눈이 벌게진 후 담임을 찾아가는 방법이 있고, 그보단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는 눈 밑에 치약을 살짝 발랐다가 닦고 나면 눈 주변이 살짝 부어오르고 치약의 매운 기운 때문에 눈이 충혈 되는 적극적(?)기법이 있다. 사실 눈이 충혈 되어서 교무실로 오면 일단 눈병은 법정 전염병이라 교실 내 감염을 걱정하는 담임 선생님들은 일단 해당 학생을 조퇴 시켜 안과 진료를 받게 하기 때문에 조퇴 성공률이 높은 편이다.
눈병도 주된 조퇴 이유 중의 하나이다
과호흡-기절
마지막으로 가장 에너지와 노력이 많이 필요한 수고로운 방법인데 ‘과호흡을 통한 일시적 기절’ 방법이다. 몇 분 동안 쉬지 않고 입으로 산소를 과하게 들이마시고 내뱉고를 반복하면 머리에 갑자기 산소가 많이 주입되므로 머리가 어지럽고 얼굴이 창백해진다. 이 방법은 주변 사람들을 많이 놀라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약간의 관종(관심종자) 경향이 있는 학생들이 퍼포먼스처럼 하는 기법이다.
한번은 체육시간에 운동을 너무도 싫어했던 우리 반 학생 한 명이 체육을 피하기 위해 과호흡을 하여 쓰러져서 주변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지만 진료결과 역시 '꾀병'으로 들통이 났다. 그때부터 내 앞에서 어떤 아이이든지간에 ‘과호흡 기절’을 시도하려는 아이가 감지되면 아예 내가 먼저 선수를 쳐서 ‘과호급의 효과와 목적, 의도 및 결과’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고나면 본심이 들통 난 아이는 계획했던 시도를 포기 해 버린다.
조퇴를 위해선 없던 이유도 만들기위해 창의성이 샘솟는다.
어쨌든,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하여 결국 조퇴증을 수중에 획득한 아이는 교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식스센스 반전급 표정으로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나간다. 그리고 교무실 밖에는 함께 조퇴증을 획득한 다른 반 아이들이 기뻐하며 그를 맞이한다.
나도 처음에는 10월 달에 아이들이 왜 이리 자주 아픈지 몰랐었다. 하지만 역시 경력과 연차가 쌓이면서 반복되는 아이들의 패턴을 완벽하게 분석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꼬리가 길면 결국 걸린다.
조퇴하고 병원 가서 치료받고 집에서 쉬겠다던 그 아이는 그 날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업데이트 하면서 그날의 행적이 고스란히 들통 나게 되었다. 분명 그 날 오전 '시한부 환자'처럼 연기하고 조퇴했었는데 사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엔 왁스로 한껏 힘을 준 후 자신의 여자 친구와 함께 다른 학교 축제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조퇴를 했던 또 다른 녀석은 병원에 있을 시간에 멀리 에버랜드까지 가서 놀고 있는 사진을 실시간으로 SNS상에 올리다가 걸리기도 했다.
담임의 역할
하긴 10월의 그 날씨 좋은 계절에 남들은 다 학교에 갇혀서 공부를 해야만 할 때 혼자 ‘쇼생크 학교 탈출’을 하여 친구들과 노는 맛이 얼마나 즐거울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솔직히 평생 학교를 다녀야하는 나도 학교 가기 싫은 날이 가끔씩 있는데(사실 학교에 자주 가기 싫다...미안...얘들아...) 아이들은 오죽할까. 교사인 나도 개학 전 날 출근하기 싫어 없던 두통도 생기고. 학기 초에는 1년 동안의 학교 일정이 기록되어있는 학교 학사력이 나오면 제일 먼저 학교 안가는 휴업일부터 형광펜으로 체크해 둔다. 나도 그런데 하물며 아이들은 학교를 '째면' 얼마나 즐거울까?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마냥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는 것이 담임의 숙명이라 마음으로는 이해해도 머리로는 아이들을 좀 더 학교생활에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얼르고 달래고, 때로는 야단까지 치는 일이 내 몫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갑자기 빌게이츠가 고등학생들에게 해 준 인생충고 한 구절이 떠오른다.
" 학교 선생님이 까다롭다고 생각되거든 사회에 나와서 직장 상사의 진짜 까다로운 맛을 한번 느껴봐라" (If you think your teacher is tough, wait till you get a boss. He doesn't have tenu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