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복수

롤링 페이퍼의 추억

by 이자까야

몇 년전 쯤인가... 1학년 전체 학급의 영어를 담당하여 가르친 적이 있었다. 전 학년을 수업하다 보면 반마다 개성과 특징이 넘쳐서 같은 내용을 수업해도 수업의 결과는 천차만별이었다.


말썽장이들이 몰려있는 반에 수업 하러 갈땐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 매야한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교과서 'Lesson 1. Travel ' 에서 시작했던 수업 내용은 아이들의 산만하고 쓸데 없는 질문으로 "travel은 여행, 여행은 하와이, 하와이는 네가 가라~네가 가라 하와이~~~~꺄르르 꺄르르 ~~" 뭐 이런 말도 안되는 흐름으로 아이들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그 날의 수업 주제는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치면 나는 계획했던 진도도 다 못 끝낸 채 수업을 마무리 하고 만다.


학급 분위기를 결정 짓는 주요 요소는 담임 교사가 학급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도 달려있지만 학급 회장과 부회장이 어떤 아이냐에 따라서도 많이 달라진다. (학급 회장, 부회장은 정말 잘 뽑아야한다!) 주로 학급 회장, 부회장 아이의 학교생활 태도와 모범적인 성향에 따라 각 교과 선생님들이 그 반에 들어갔을 때 수업을 편하게 하기도 하고, 커피를 한 사발 원샷하고 수업을 들어 가도 아이들에게 멘탈이 탈탈 털려서 동공 풀린 눈으로 비틀거리며 교실에서 벗어 나기도 한다.


1학년 3반은 학급 회장보다 학급 부회장 아이가 듬직하고 포스가 있어 수업 시간에 수업 분위기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항상 맨 앞자리에 앉은 학급 부회장 재영이는 큰 키는 아니지만 다부진 골격을 가져서 학급 내에서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1학기 초에는 날씨가 추워 교복 동복 재킷을 갖춰 입는데 재킷을 단정하게 입은 재영이는 참 듬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재킷을 벗은 재영이를 보게되었는데 동급생에 비해 유난히 어깨가 좁아서 듬직했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 재킷을 입은 재영이와 재킷을 입지 않은 재영이는 '상남자의 어깨'에서 '소녀의 어깨'로 변신한다. 교복 재킷 안에 들어 있는 '어깨 뽕'의 효과가 이렇게 엄청 날 줄이야. 재영이도 그걸 아는지 5월말이 되고 날씨가 더워져서 교복 재킷을 벗어야하는데도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교복 재킷을 벗으려하지 않았다.


"재영아, 더우면 교복 재킷 벗어도 돼~이제 학교에서 교복 동복말고 춘추복으로 입으라고 했잖아."

(교복 춘추복은 동복에서 그냥 재킷만 벗으면 되는 복장이다.)


"재영이는 '어좁이'(어깨가 좁은 사람)라 재킷 벗으면 안돼요!!! 깔깔깔~~~"


반 아이들이 놀리면서 재영이 대신 대답한다.


더워도 꾸역꾸역 재킷을 고집하는 모습이 다소 애처로워서 재영이에게 차라리 푸쉬업을 해서 어깨를 키워보라고 권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운동을 할 시간에 공부를 더 해야한다는 강박증이 있는 재영이는(그렇다고 딱히 공부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운동을 권할때마다 내키지않아 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나는 학급 부회장으로서 수업 분위기를 잡는데 도움을 주는 재영이가 고맙기도 했고, 재영이에게 도움이 되는 뭔가 조언을 주고 싶어서 가끔 수업이 일찍 끝날 때면 재영이에게 푸쉬업이나 다른 운동을 권하곤 했었다.


"재영이는 공부도 열심히 하니까 운동까지 하면 완벽한데~~~"

" 재영아, 공부도 좋지만 쉬는 시간에라도 몇 분씩 푸쉬업을 해봐~"


하지만 역시 운동을 싫어하는 재영이는 어깨가 좁아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운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재영이에게 어깨 운동을 권하는 일은 포기해 버렸다.


12월 학기 말 마지막 수업이 되자 수업하기도 애매해서 아이들과 1년 동안의 영어 수업에 대해 한 해 인사를 할 겸, 추억도 되집어 볼 겸, 다함께 '롤링 페이퍼'(종이에 학급 아이들이 전부 돌아가면서 하고 싶은 말을 적는 것)를 했다. 아이들은 무기명으로 쓰자고 했다. '무기명'에서 약간 걱정은 되었지만 쿨하게 그러자고했다.

한 시간 동안 아이들은 롤링 페이퍼에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수업이 끝나는 벨소리가 울리고 나는 1학년 3반의 마지막 수업에 대해 작별 인사와 내년 새해 인삿말을 해 주고 아이들이 작성한 롤링 페이퍼를 선물로 들고 교무실로 돌아 왔다. 교무실 내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아이들이 쓴 글들을 읽어 보았다.


"선생님~~ 수업 재밌었어요~~~"


"선생님, 1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 선생님, 수업시간에 요가 시키는 거 너무 힘들어요~~"


" 2학년때 만나요~"


그러다 파란 색 볼펜으로 쓴 강렬한 문구가 내 눈을 사로 잡았다.


"나는 어깨뽕, 선생님은 가슴뽕!"


무기명으로 쓴 글이었지만 이 글의 주인공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재영이 고 녀석이다! 어깨 운동 하라는 말을 이렇게 그 아이답게 복수한 거였다.... 고집쟁이 재영이는 그 짧은 말 한마디로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참 심지가 굳은 녀석이었다.(근데..가슴뽕은 어떻게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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