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금이 많이 나가서 금전적 부담도 있었지만 작년까지는 무엇보다 하객룩으로 무엇을 입어야할지 큰 고민이었다.
옷장을 열어본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붙박이장에는 터질 정도로 옷이 가득차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입을 게 없다는 거다.
블라우스를 입은 헐크
옷이 다 옛날 스타일이라 마음에 안드냐고? 아니다. 내 몸에 들어갈 수 있는 옷이 없었다! 그래도 그 중 가장 하늘거리고 입었을 때 여유가 있을 것 같아 보이는 블라우스를 골라서 힘겹게 입어 보았다. 과학자 '부르스 배너'가 '헐크'로 변신한 후의 모습처럼 블라우스는 살에 밀려 터지기 직전이었다. 팔뚝은 우람해 보이고 겨우 잠근 단추는 어디론가 튕겨 나가기 위한 도약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옷을 다시 벗으려는데...젠장...블라우스가 신축성이 별로 없는 소재라그런지 몸에 끼어 잘 벗겨지지도 않는다.
"찌~ 익~~ "
억지로 벗다가 결국 애꿎은 블라우스 겨드랑이 한 쪽만 찢어먹었다.
보정 속옷을 발견하다
큰일이었다. 결혼식은 다음 주 주말인데 어떻게 살을 빼나...아니 뱃살만 좀 들어가도 대충 옷맵시는 날텐데...
심리학에서'컬러 배쓰 효과'(color bath effect)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떤 컬러에 꽂히면 그런 색깔만 보이는 증상을 말한다. 나도 마음이 절실해서 였을까? TV 채널을 돌리다가 홈쇼핑에서 보정 속옷을 광고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성 쇼호스트 2명이 몸의 실루엣이 여실히 드러나는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자신들의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곤 몸매가 좋아 보이는 건 다 이 보정 속옷 때문이란다.
튀어 나온 살은 눌러주고 처진 엉덩이는 업 시켜준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제품자랑을 한다. 60대로 보이는 인상좋고 뱃살이 넉넉한 일반인 여성 모델이 보정 속옷을 입은 전, 후 모습을 보여준다. 커다란 표주박 같던 배가 보정 속옷을 입자 마법처럼 사라졌다.
"어머, 저건 사야해!!!"
내 손은 다급하게 핸드폰 번호를 눌러 제품을 주문한다.
보정 속옷 그 3시간의 마법
다행히 주말 결혼식 전에 보정 속옷이 배송되어 결혼식에 착용하고 갈 수 있었다. 허리가 긴 거들 모양의 보정 속옷을 입어보니 이 쬐그만 속옷은 의외로 내 몸에 잘 들어갔다. 홈쇼핑에서 본 것 만큼은 아니지만 그냥 옷을 입었을 때보다 배가 들어가 보였고 없던 허리라인도 신기루처럼 살짝 생겼다.
허리라인이 잠시 동안 신기루처럼 생겼다 ...
"역시 돈을 투자하니 좋긴 좋구나!"
충동 구매의 결과에 대해 나름 흡족해 하며 결혼식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제는 3시간쯤 지나서 부터였다. 평소 안 입던 꽉 끼는 보정 속옷을 입어서인지 체한것 처럼 명치 쪽이 답답했다. 게다가 식당에서 뷔페를 먹다가 음식이 걸리는 느낌이 들면서 속이 울렁거려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자마자 보정 속옷을 벗어버렸다. 속옷을 벗자마자 갑갑하던 번데기 안에서 탈피한 나비처럼 몸이 가볍고 체기가 쑥 내려갔다. 뱃살 좀 숨겨보겠다고 보정 속옷으로 꼼수 쓰다가 조상님 만나뵙고 인사드릴 뻔했다. 결국 결혼식장에서 오래간만에 본 지인들과 여유로운 대화도, 뷔페에서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은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역시 세상만사 꼼수를 쓰면 오래 못 가는법인건가...
지금도 서랍장 구석에 고이 접어 놓은 보정 속옷을 볼때면 피식 웃음이 난다. 운동은 귀찮고 날씬 해 보이고 싶긴한 내 욕심의 산물같아서.
아마 지금도 누군가는홈쇼핑에서 보정 속옷을 주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처럼 딱 3시간 동안만 날씬해 지고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새해 부터는 정직하게 운동으로 날씬해지자. 단 몇분이라도 꾸준히 운동한다면 내 몸에 대해 더 당당해질수 있다. 몇 시간의 마법따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얘기다. 내년 결혼식장엔 보정 속옷 없이 '내게 맞는 옷'이 아니라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당당히 참석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