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고등학교의 고3 입시 생활은 학생도 담임 선생님도 학부모도 모두들 날카롭게 날이 서있다. 그런데 그중 고3 담임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감정의 액받이’ 역할도 해야 해서 감정 소모가 심하다. 가끔은 이런 상황에 특화되어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선생님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다.
혼돈의 고3 교실
밖에서 바라보면 고3 수험생들의 교실은 학생들이 수능 날까지 D-Day를 외치며 최선을 다해 촌각을 다투어 공부에 매진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엄청난 착각이다! (우리의 입시 시절을 돌이켜보면 깨달을 수 있다!)절대그.럴.리.가.없.지.않는가!!!
고 1~ 3학년 중에서 고3들이 가장 공부를 하지 않는다. 물론 고3 아이들의 마음도 이해한다. 입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지니까 현실에서 도피하고픈 ‘회피 기제’가 작동하기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은 수능이 다가옴에 따라 평소 전혀 안 읽던 장편소설 시리즈물을 탐독하기 시작하고, 어떤 아이들은 틈만 나면 축구에 몰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의 축구 실력이 고3 때 가장 일취월장한다. 게다가 이제 곧 20세가 되는 녀석들이 요즘 중학생들도 하지 않는 ‘말뚝박기’를 쉬는 시간마다 하다 허리를 다치기도 한다. 나머지 아이들은 이 삭막한 입시 현실을 부정하고 동면에 들어가듯 책상에 엎으려 잠만 자고 있다. 누가 급식에 수면제라도 탄 건가? 얼씨구? 오늘은 몇몇 녀석들이 쿠션감이 좋은 베개와 극세사 담요까지 구비해 왔다! (쓸데없이 적극적인 녀석들 같으니라구...)수능이 다가올수록 교실은 혼돈 그 자체가 된다.
고3 교실은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
힘든 9월과 10월 – 학생부 종합전형 수시 지원의 계절
고3 담임의 고된 업무의 정점은 9월과 10월이다. 8월 말 수능 응시원서 접수를 시작으로 9월부터는 본격으로 수시모집 접수가 시작된다. 수시모집에서는 학생부가 고1부터 고3 1학기까지 반영되므로 8월 말까지 성적처리와 학생부의 모든 입력사항을 완료해야 한다. 누락된 내용은 없는지 오자는 없는지 이 기간 동안만은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며 눈이 뻑뻑해지도록 나이스 생기부를 입력한다.
끝이 없는 자기소개서 작성
무엇보다 가장 힘든 일은 수시 지원을 위한 교사 추천서 및 학생 자기소개서 작성이다. 교사 추천서야 원래 교사들이 써준다고 하더라고 학생 자소서는 학생이 써야 한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19년 인생 동안 일기 한 번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학부모님들~ 제발 아이들 일기라도 꾸준히 쓰게 해 주세요!) 이 중요한 시기에 1000자~1500자 또는 2000자의 자기소개서를 쓰려고 하니 자소서 내용이 아주 가관이다. 일단 주어와 술어가 전혀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고, 요즘 유행하는 소위 ‘급식체’같은 표현도 있다. 또한 대학이 요구하는 질문에 동문서답의 말을 써놓기도 한다.
'아이고...머리야....’ 학생들의 자소서를 날것 그대로 읽다 보면 없던 두통도 생긴다.
한 학생의 자소서를 학생과 함께 검토하던 중 갑자기 울컥하여 아이를 째려본다. 이번 자소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할 정도다. 마음만은 착하디 착한 아이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푹 숙인다.
‘에고..... 화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나는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하고 내용을 처음부터 수정하기 시작한다. 자소서를 다시 작성하고 나니 그다음 아이가 본인의 자소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다.
‘나 좀 살려주라~ 이 녀석들아....’
영광의 상처 -탈모 '땜빵'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아침 7시 반에 출근했으니 벌써 학교에 15시간 넘게 있었던 셈이다. 요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인지 업무과다인지는 몰라도 머리 앞부분에 탈모가 와서 엄지손가락 크기만큼의 ‘땜빵’이 생겼다. 그런데 이 ‘땜빵’의 범위가 자꾸 넓어지고 있는 게 문제다. 그동안 계속 긴 머리를 유지해 왔는데 앞 머리 쪽만 빠지면 이러다 ‘중국 변발족’처럼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자소서를 작성하다가 갑자기 인터넷으로 탈모에 좋다는 ‘어성초’와 ‘하수오’의 효능을 몰래 검색해 본다. 오늘은 학생들 자소서는 이것만 수정해 주고(사실 수정이라기보다는 거의 새로 써주고 있지만) 빨리 집에 가서 한 숨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