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산다는 것은 눈앞의 이익이나 자연공학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결코 보이지는 않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한 세상입니다. 누구나 한 숨을 참고, 두 숨을 참으며 꺾여서 사는 삶입니다. 거기서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을 배우며 또 다른 기쁨으로 이겨내는 것일 것입니다.
계속 죽는 삶도 있겠지만 견디면 살아나는 인생은 뭔 가를 지키려는 인생입니다. 몸을 이루는 세포들도 죽어야 다시 살고, 이순신도 그랬고, 당신도 그렇습니다.
틀에 박힌 생활, 삶이 흘러가는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고, 새로운 뭔가를 찾을 때가 바로 인생리셋 버튼을 누를 때입니다. 인생의 리셋 버튼을 누른다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지겠지만,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하면 커다란 변화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납니다. 언어를 공부할 때도, 시험을 준비할 때도, 책을 쓸 때도, 지독한 투병의 시간에도 죽다 살아납니다.
죽어야 사는 리셋버튼을 누르면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 좀 더 깊이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반성과 계획의 단계.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금의 인생을 바꾼다는 것은 쉽진 않습니다.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는 말처럼 실제 길을 걸을 수 있는 역량, 올바른 길을 보는 눈, 그리고 행동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지식은 앎으로 나타나며, 생명은 삶으로 자신을 나타냅니다. 압축된 대표성으로 3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가장 쉽고, 기본적인 그러나 쉽지 않은 처음 순서는 이전 삶과 다르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이들은 기꺼이 이방인이 되기도 합니다. 다르게 이해하며 살기 위한 최고의 처방일 수 있습니다.
필요하면 이주하라. 이방인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주합니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한 사람에게 조국은 계모와 같습니다. 그 삶이 싹튼 토양에는 질투가 팽배할 수 있기 때문이죠. 또 사람들은 재능이 성장한 위대함의 때 보다 처음 싹텄을 때의 불완전함을 더 잘 기억합니다. 낯선 것은 그것이 미지에서 왔거나, 완성된 상태에서 수용되기 때문에 다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한때는 자기가 살던 땅에서 경멸만 받은 후에, 조국에서도 외국에서도 존경받는 사람들을 우리는 익히 보았습니다.
자기 정원에서 늘 보아온 동상을 제단 위에 세울 만큼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똑같은 생수도 길거리와 호텔에서의 가격이 10배 이상 차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악은 주어진 선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실체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죽었다 사는 인간의 여건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며, 살 수 있는 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생명의 삶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전의 삶과 같은 동일한 행동, 생각 그리고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변화는 어렵습니다.
다시 살아난 당신의 두 번째 행동은 사람에 대한 이해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 많은 것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람의 이해능력은 갈등해소의 능력입니다. 긍정적 방향의 갈등 해소법은 공감인데, 인지적 공감뿐 아니라 정서적 공감도 중요합니다.
정서적 공감은 말에 귀 기울이는 것, 생각에 동조하는 것, 행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지적 공감은 상대를 이해보다 사랑이라는 선행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랑이란 올바른 방향을 알려 주는 나침반과 나쁜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북극성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