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ditions

Clear and serene joy

by 고시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괴이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평범한 표현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옮길 따름이지만, 비유적 표현은 모든 것을 가장 신선하게 붙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위대한 일은 비유의 대가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접하고 있는 이미지, 은유 metaphor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비유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것을 요구하죠. 곧 여유와 지혜 그리고 느낌 있는 멋입니다. 행복을 은유해 볼 수 있다면 당신은 행복한 상태입니다. 아니 행복할 자격을 갖춘 분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가 낮은 단계부터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고 했습니다. 본능에 가까운 생리적 욕구로부터 안전의 욕구, 사회적인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존재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까지 욕구는 다차원적이라고 했죠.

행복도 다차원적입니다. 첫째는 ‘감각적 행복’입니다.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조건이 채워짐으로 인해 느끼는 행복입니다. 둘째는 ‘사회적 행복’입니다. 꿈을 이루거나 성공했을 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취를 했을 때 느끼는 행복입니다. 셋째는 ‘감성적 행복’입니다. 아름다운 음악, 그림, 글, 연극, 영화를 감상할 때 느끼는 심미적 행복입니다. 맑고 시원한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 맑고 깨끗한 호수를 걸을 때 느끼는 행복이라고 할 수 있죠.

넷째는 ‘전인적 행복’입니다. 외부의 상황이나 조건에 부침이 없는 내적인 평화의 상태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부분적인 행복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이 통합되고 삶과 존재가 하나가 되는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첫째와 두 번째의 행복은 상대의 아픔이 동반되는 행복이기에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단어를 붙이는 것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와 네 번째의 행복은 작아 보이지만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돌보며 지켜줍니다.




행복은 질과 깊이도 각각 다릅니다. ‘감각적 행복’은 짜릿한 쾌감과 희열의 극치에 쉽게 도달하는 대신 시간이 매우 짧고 제한적인 외부 의존적이고 조건적입니다. 쉽게 깨집니다. 배고픈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매력적인 이성과 관계를 할 때에는 최상의 짜릿한 희열을 느끼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사회적 행복’은 감각적 행복 못지않은 짜릿한 쾌감과 희열이 있습니다. 조건적이고 외부 의존적이며 쉬 깨진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감각적 행복보다는 시간적으로나 질적으로 깊이가 있고 오래 유지됩니다.

‘감성적 행복’은 외부적 조건과 상관없이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만 준비되고 열려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누릴 수 있습니다. 한 잔의 물을 마시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북적이는 지하철 속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정갈한 마음, 번득이는 영혼, 예민한 감각, 모든 걸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과 맑은 이성을 지니고 있다면 외부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이 감성적 행복입니다.

‘전인적 행복’은 감각적 행복과는 다르게 짜릿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물과 같이 덤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묵은 동치미의 무처럼 깊은 맛이 납니다. 순간적이거나 변화무쌍하지 않습니다.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 영역에 걸쳐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 행복은 잠시 멈추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지만 이내 곧 회복될 수 있습니다. 전인적 행복은 본질적으로 내면적이지만 조건적이지는 않습니다. 삶의 다양한 영역이 두루 통합되어 있고, 삶과 존재가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험한 세파에도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20세기 미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도사이자 문필가로 알려져 있는 토마스 머튼의 고백을 들어보면 전인적 행복이 어떠한 것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홀로 있음’이라는 소명을 발견할 후, 내 생애 처음으로 너무나 완전하고 심원하여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행복을 맛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내가 행복했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없었다. 이 행복은 진짜였고 항구적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의 심층까지, 모든 마음의 풍랑, 모든 두려움, 가장 깊은 어둠 속까지 파고들었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거기에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먹고 자는 것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놀이’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기 위해 딸랑이를 흔들고, 손뼉을 쳐 줍니다. 아이를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이에게 행복감을 전해 주는 길임을 압니다. 아이들은 풀밭에서 뛰어만 다녀도 재미를 느끼고, 작은 일에도 한참을 까르르 웃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은 인간의 원시적인 자연 상태가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죠. 이렇게 재미로 충만했던 우리의 모습은 나이 들어가며 잊어 가고, 무감각해져 버립니다.

기쁨은 놀이에서도 나타납니다. 놀이를 모르는 것은 재미없고, 여유가 없으며, 빨리 늙고, 또 실제로 일찍 죽습니다. 인간의 삶에 놀이는 중요합니다. 놀이는 인간의 본성이며 특권입니다. 놀이가 모든 인류문화의 원류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될수록 놀이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놀이를 통한 인위적인 행복이라도 만들 수 있는 당신이 되길 바랍니다.

기뻐하고, 웃으시죠. 배려이자 공감을 자신에게 보내 보죠. 살아 있음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