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스로 향하는 내내 고개를 파묻고 있다시피 했다. 수멜라 수도원에서 돌아온 후 버스시간까지의 긴긴 공백도, 매번 출발시간을 어기는 터키의 버스마저도 반가웠다. 도착하기 전까지 끝내야만 할 일이 있었다. 오르한 파묵의 <눈>을 읽어내는 것. 책을 읽고 장소를 꿈꾸기보다, 장소를 정하고 책을 읽는 다소 아이러니함. 억지스럽게 정한 장소지만 구태여 매력적으로 느낄 필요를 억지로 찾고 싶어서일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진에는 힘이 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이 수만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사진 속 장소라는 이유만으로 의미가 담긴다. 하지만 사진보다 더욱 큰 힘이 있다. 바로 이야기가 지닌 힘이다. 인어공주 동상 하나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찾는다. 물론 생각보다 작고 초라한 동상을 보고 대부분 실망하기 일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연코 이야기가 지닌 힘 때문이다. 비싼 비행기표를 결제하게 만드는 힘, 멀고 먼 길을 돌아오게 하는 힘, 일정에 없는 곳을 방문하게 만드는 힘.
이야기는 장소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카르스는 오르한 파묵의 장편소설 '눈(Kar)'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이다. 주인공 카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망명을 떠났다가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터키로 돌아오며 소설이 시작된다. 터키에 돌아온 주인공은 좌파 성향의 신문기자로 위장, 카르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히잡 소녀들의 연쇄 자살 사건과 시장 선거를 취재하라는 임무를 받고 그곳으로 향한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옛 연인, 경창청장, 시장 후보, 마을 사람 등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현재 터키를 관통하는 세력들을 각 등장인물로 녹여서 표현한다. 현재 터키 사회의 문제점. 가령 세속주의와 전통주의의 갈등, 타국과의 정치적 갈등, 민족과 민족, 종교와 종교의 갈등을 카르스라는 작은 무대를 배경으로 담아낸다. 분명 수많은 갈등이 혼재하지만 눈이 지닌 특유의 포근함으로 모든 사건을 감싸 안는다.
슬슬 아니(Ani) 유적 말고는 볼 게 없다고 생각했던 외딴 도시에 흥미가 생긴다. 단순히 관광지에 불과했던 장소가 꼭 가보고 싶은 장소로 바뀐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지에 불과했을 카르스에 남다른 흥미가 돋는다. 소설뿐만이 아닌 카르스 자체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카르스에서의 가장 최초의 정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10세기에 바그라티드 왕조의 수도가 된 이래로 꾸준히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11세기에는 셀주크 투르크가, 13세기에는 조지아 인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16세기에는 동부 아나톨리아의 다른 지역들처럼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되어 19세기까지 그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의 긴 19세기 중후반 러시아-튀르크 전정에서 러시아 군이 점령을 했었고, 1887년에 이르러 산 스테파노 조약 체결로 러시아 제국에 공식 합병됐다. 그 과정 중 러시아식 도시계획이 시행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카르스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
짧은 안정기도 잠시, 1918년 에 터키군이 카르스를 다시 점령했고 다음 해 1월 아르메니아군의 반격으로 카르스를 잃게 된다. 이때 아르메니아군은 카르스에 살고 있는 무슬림을 학살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터키군은 1920년 카르스를 병합 후 막대한 수의 아르메니아 인을 학살했다. 그 후 1921년 11월, 카르스 조약에 따라 길고 긴 영토분쟁의 끝을 맞이하게 된다.
고작 몇 문단으로 요약된 카르스의 역사지만, 숱하게 많은 전쟁과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는 물론 무슬림과 아르메니안 정교회의 갈등, 민족 간의 갈등이 수없이 얽히고설켜 종국에 이르러서는 무슬림 대학살과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이런 카르스를 배경으로 오르한 파묵이 눈이라는 책을 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터키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오랜 종교, 정치적 갈등,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소설을 통해 묘사하는 것, 환부를 감추기보다 드러내 인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트라브존에서 출발한 버스는 한참을 달리고 달려 숨 막히는 정적이 지배하는 어느 곳 당도했다. 일출시간보다 훨씬 일찍 주위가 밝아져 차양을 치우고 창밖을 바라본다.
눈 덮인 고요의 대지, 광활한 들판 위에는 눈 말고는 쌓인 것이 없어 시야에 제한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눈 그 자체로 외부와 단절케 하는 먹먹함이 전해진다. 온 시선을 압도하는 풍경을 마주하고 나니, 어제오늘 고개를 처박고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소용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동쪽으로 달린 야간 버스에 샛노란 태양빛이 스며들다 점차 백광으로 온 내부를 물들이자,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묵묵히 카르스의 풍광을 눈에 담았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내가 몇 년 만에 이 설원을 찾은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쓸 데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가 쉿 하며 비난 섞인 주의를 줄 것만 같아, 오롯이 황량하지만 황홀한, 역설적인 대지를 두 눈으로만 담으며 조금 일찍 떠오른 태양에 비친 설원을 바라본다.
이 먼 곳까지 누가 길을 닦아놨는지, 인적이 끊긴 도로를 버스는 끝도 없이 달렸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니 마침 먼지를 머금어 지저분해진 눈이 쌓여있다. 때 묻지 않은 순백의 눈길을 달려와서일까. 잿빛으로 물든 눈이 조금은 반갑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제야 사람이 사는 동네에 왔구나.
내가 묵는 호텔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며, 근처에 택시를 내려준다. 뭐 잘됐지. 도시의 분위기도 살필 겸 구글맵에 의존한 채 호텔까지 걷는다. 러시아식 도시계획이라더니 도시의 분위기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건물들이 가로 세로 차선을 중심으로 질서 정연하게 들어서 있다. 조금의 빈 공간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빡빡하게 건물들이 들어차 있다. 야트막한 언덕조차도 없어서 직사각형 도로에 직사각형 건물들을 테트리스처럼 욱여넣은 것 같다.
카르스 여행은 대개 아니 유적투어를 주선해주는 호텔에서 시작된다.(사실 호텔 예약 사이트를 뒤져봤자 몇 개 나오지도 않지만) 그중 호텔 켄트 아니는 나름 저렴한 가격대에 그럭저럭 괜찮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로 정평이 나있다. 성수기가 아니라 혼자 투어요금을 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조금이라도 관광객이 몰린다는 켄트 아니로 숙소를 예약했다.
도시의 투박함에 어울리는 실내를 기대하며 건물 내부로 들어왔다. 하지만 지배인의 취향이 다분히 반영됐는지, 건물 외관의 투박함과는 상반된 화려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하루 종일 로비에서 시간을 보내라면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한 실내, 적당한 기울기의 등받이가 있는 소파와 푹신한 쿠션, 화려한 듯 하지만 묘한 통일감이 있는 무니들이 조화를 이뤄 켄트 아니만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고작 1,2만 원에 더블룸을 이용할 수 있는 호텔에 이런 인테리어라니.
10분 쯤 기다리니 낡았지만 정성 들여 다림질한 수트를 입은 중년인이 맞아준다. 손님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절도 있는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어 몇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 만으로 기분을 좋게해 삭막한 도시에 잔뜩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녹는다.
로비에 앉아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한 서양인 할아버지가 호텔 종업원과 대화를 한다. 마침 아니 투어에 대해 의견을 조율 중인 것 같다. 옳다구나! 관광객 하나 없는 황량한 도시에서 동행을 구하기도 시원찮아 반쯤은 포기했었는데. 할아버지면 어떻고 서양인이면 어떠하리. 얼른 다가가 동행 여부를 물어본다.
- 미안한데 혹시 오늘 아니 유적 투어를 하는 거면 나도 동행할 수 있을까?
- 그럼 당연하지. 우리는 2명이라 네가 함께한다면 비용을 아낄 수 있을 거야. 대신 오전 9시에 출발해서 3시간짜리 투어를 할 건데 괜찮겠어?
응? 보통은 2시간에 끝나는 아니 유적인데 3시간짜리라니. 의아해서 물어보니 대답이 이렇다.
- 우리는 어제 이미 다녀왔는데 2시간은 너무 짧아. 오늘 다시 3시간 동안 유적을 관광할 거야. 그리고 디고르(Digor)에 있는 아르메니안 성당까지 트레킹도 할거야.
딱히 아니유적 말고는 관광할 것도 없는데 3시간짜리 투어면 어떻고 트레킹이면 어떠하리. 냉큼 수락하고 9시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잠 한숨 못잤지만 왠지 그럴싸한 에피소드가 생길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