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빛으로 탁하다, 예실으르막

당신이 아마시아에 간다면 한 번쯤은 참고해도 좋을 법한 이야기

by Neonsky

## 예실으르막

푸른빛으로 탁하다.

예실으르막의 모습을 설명하기엔 이보다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메이단 공원을 낀 티켓 오피스들 사이에서 겨우 트라브존행 야간 버스 티켓을 구입한 찰나였다. 오로지 이곳을 빨리 떠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삼순을 거쳐 흑해로 이어지는 최장거리의 강물 예실으르막. 마치 흑해의 검은 물빛에 일조라도 한 것처럼 탁한 빛으로 흐르는 강물은 석회암 산이 만든 칙칙한 분위기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본디 뜻은 푸른 강이지만 전날 내린 비 때문에 강바닥의 흙이 까뒤집어졌는지, 아니면 산에서 흘러내린 흙탕물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푸른빛보다는 언뜻 황하강의 탁함과 비슷했다. 전날 밤의 화려한 네온 조명은 어디 갔는지 고요함만이 아마시아에 내려앉았다.


이제야, 하루키가 표현하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아마시아에 도착한 것 같았다.



아침의 고요함을 깨뜨리기 싫어 사진을 찍거나 음악을 듣는 일 없이 숙소로 돌아왔다.

바로 체크아웃을 하고 싶었지만, 전날 당한 생명의 위협에 대해 하소연이 먼저였다. 100리라짜리 싸구려 호스텔에 크게 바랄 것은 없었지만 어제는 좀 너무하지 않은가.


9시가 되도록 잠을 자고 있는 직원을 깨워 아침밥을 달라 채근한 뒤 멍하니 우물을 바라보며 터키식 아침식사인 카흐발트를 기다렸다. 어떻게 씹어줘야 내가 전날 당한 수모를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을까. 짧은 영어 몇 마디를 고르고 고르며 있던 찰나 마침 사장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꿀과 오이, 토마토 등을 곁들여 먹는 터키식 아침식사 카흐발트

나 전날 불나서 죽을 뻔했어. 다행히 밤새 비가 내려서 집 전체가 불타진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나 하나는 확실히 죽었을 거야. 베개 뒤에서 벌레 시체도 나왔다고. 게다가 조식 시간이 8시라며? 9시가 넘었는데 대체 어디에 조식이 있는 거야?


불타버린 콘센트와 벌레의 시체 사진을 차근차근 보여주며 설명을 했더니 짐짓 놀란 눈치였다. 영어가 딱 내 수준으로 보였으니 내 어설픈 영어에도 대충 알아듣는 눈치였다.


걱정 마, 그래도 부킹닷컴이나 구글맵에 리뷰를 작성하지 않을 거니까. 조심해줬으면 좋겠어. 난 뉴스에 나오기 싫어.


라며 쿨하게 돌아서 체크아웃을 했다. 나름 부당함에 대해 멋지게 대응한 것 같았으나.. 기왕이면 아침이라도 먹고 나올 걸 그랬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식당을 찾아다녔지만 구멍가게 말고는 문을 연 식당이 없었다. 고요한 아침의 도시 아마시아는 식당마저 고요했다.



## 석굴 분묘

남들이 내게 아마시아의 대표 관광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마시아 강이라고 말해줄 것 같다. 하지만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한강’이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은 헛소리일 테니.. 정상적인 관광지 정도는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다.

이 인구 10만의 도시를 유명하게 만든 건 석굴 분묘 KralKaya Tombs라 불리는 왕들의 무덤이다. 시내를 둘러싼 석회암산의 중턱에는 폰투스 시대에 바위를 깎아서 만들어진 왕실의 무덤 21개가 위치해있다. 폰투스 왕국이 멸망한 후에도 로마, 비잔틴, 아랍, 아르메니아, 그리고 11세기 이후에는 셀축과 몽고인들 오스만 제국이라는 수많은 문명의 빈자리를 채워왔지만 한결같이 아마시아의 상징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산 중턱이라고 해봤자 메이단 공원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입구에 도착할 수 있고, 한 바퀴를 천천히 둘러보는 데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다만 돌계단을 꽤나 걸어 올라가야 하고 그나마 있는 나무 발판도 부실하게 이를 데 없으니 샌들이나 구두보다는 운동화를 신고 올 것을 권장한다.


산 중턱부터 두텁게 내려앉은 안개를 가로지르는 계단과 드문드문 보이는 석굴 분묘들은 이전까지의 아마시아가 아닌 다른 세상의 경계에 위치한 것처럼 보였다. 불과 시내에서 5분을 걸어 나와 맞이하는 풍경 치고는 무척이나 이색적이었다. 마치 전혀 다른 두 장소의 풍경을 한 지점으로 이어놓은 것만 같았다. 비현실의 경계 속에 잠시 서 있었다.

나사가 잘 조여지지 않거나 헐거워진 곳이 많다.

하지만 전혀 관리되지 않는 듯 여기저기 보이는 낙서들, 안쪽까지 빼곡히 버려진 쓰레기들은 어제의 그 화려하게 빛나던 곳이 맞나 싶었다. 오전에 오른 석굴 분묘의 모습은 이미 쇠퇴해 멸망한 오스만 제국만큼이나 초라하게 보였다.


한때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고 부르짖던 터키인의 모습이 떠올라 우스웠다. 물론 변명거리는 있을 터였다. 오스만 제국의 유적지라기보단 B.C. 333년부터 B.C.26년까지 아마시아를 수도로 삼고 다스렸던 폰투스의 왕들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우상이나 형상을 만들지 않는 이슬람교의 특성상 누구의 무덤이라고 열과 성을 다해 관리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여러 낙서들과 부서진 난간 등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와 역사를 떠나 문화재를 대하는 터키인들의 태도는 여행을 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면들이 종종 있다. 심지어 그 문화재로 돈을 벌어먹고 살면서 관리조차 안 하는 꼬락서니는 영 아니올시오다.



## 술탄 베야즛 2세 모스크와 밀랍인형 박물관

아마시아의 또 다른 이름은 ‘왕자들의 도시’다. 오스만 제국의 왕자들은 왕이 되기 전 아마시아에서 군주 수업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었다.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자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왕자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까지 더해져 군주 놀이 하기에는 적합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모스크로 향하는 길

15세기에 이스탄불을 정복한 위대한 술탄 마흐메트 2세도 아마시아에서 군주 수업을 받았고, 그를 기념하는 모스크가 이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역대 왕자들의 모습을 밀랍으로 만들어 전시한 박물관이 그 강 건너편에 위치해있다. 시간을 들여 꼼꼼히 둘러볼 정도의 관광지는 아니지만 이런 역사적 배경이 더해져 석굴 분묘와 더불어 아마시아라는 지역을 이해하는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가 기대했던 아마시아(Amasya)가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