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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Dec 29. 2021

쌩큐 포 더 뮤직


   쌩큐 포 더 뮤직               

 오카리나를 배우기 시작한 지 이미 수개월째, 이제 겨우 음을 찾아 연주할 정도다. 말로만 듣던 오카리나. 맑고 청아한 음색이 경쾌하면서도 신비스러워 호기심은 있었지만 다루고 싶다는 생각은 정작 해본 적이 없던 악기다. 그런데 절친한 지인의 그저 한번 권해 보는 것에 나도 모르게 그만 동참하고 만 경우가 되었다. 처음 악기를 손에 넣었을 때 쥐어지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불지는 않고 만지작대다 품어 보고 볼에 대어 보던 모습을 생각하면 생뚱맞기만 하다. 도자기의 감촉이 묵직하면서도 자그만 해서인지 듬직하면서도 사랑스럽다.

 오래전 나이 들어 작은 악기 하나 정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품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물색하던 것이 아이들이 다루다 만 은빛 플롯이나 주머니에 폭 꼽을 수 있는 하모니카 정도였는데, 몸에 지니기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하모니카에는 누구에게나 옛사랑 같은 묘한 것이 먼 그리움처럼 따라오는 게 있어 구체적으로 강습을 알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다 뜻밖에 만난 오카리나가 다소 의외이기는 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단짝이 될 것 같은 예감은 어쩐지 틀리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이미 수십 년 전에 피아노와 기타를 곁에 두고 열중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악기를 만지고 싶다는 것은 음(音)에 대한 낙(樂)에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예전 우연히 음악실기 시험에 80점 이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어지간히 음률(音律)에는 자신이 없다. 그 탓에 음악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보지는 못했다, 그래선지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듣기라서 종일 고정된 음악 채널에 묶여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대부분이다. 혹은 기호에 맞는 곡만 찾아 오디오를 곁에 두고 지내는 편이다. 결코 좋은 음악 감상법은 아니지만 이미 학창 시절부터 시작한 음악에 대한 편식이기도 하다.

 그렇기는 해도 그 시절 음악 시간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이렇게 많고 많은 좋은 음악들을 가까이 두고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 여긴다. 당시 모교 음악 선생님은 굵은 음성이 매력적인 바리톤 가수이셨는데 우리에겐 끔찍할 정도로, 낯선 서양 가곡을 원어로 부르는 시험을 자주 치르곤 하셨다. 시청각실에 모여 FM을 듣던지 수업시간 3년 동안 고전음악을 감상한 후 또한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런 음악 선생님을 학생들은 좋아라 할리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음악에 귀가 트이었고 이태리 가곡 한두 곡 몇 마디쯤 흥얼 될 정도 되었다고 동문을 만나면 진심으로 끄떡이며 말한다.

 성격이 그리 동적이지 못해 특히 노래를 불러야 할 자리는 최대한 피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음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통 부르지를 않아서인지 요즘은 음치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런 이유로 점점 가창과는 멀어지고 역시 듣는 편이 좋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적극적인 음악 활동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래를 잘하는 이가 부러우면서 어느 자리에서나 스스럼없이 즐겨 부르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때문이다. 가장 완벽한 악기가 목소리라는 정의가 아니더라도 소유하기 가장 간편한 악기인 것은 확실하다. 율동에 곁들여 리듬까지 타고 싶다는 생각까지 있으니 놀라도 참 놀라운 생각의 발전이다. 오죽하면 가까운 친구에게 노래교실을 함께 가지 않겠느냐, 청해 보기도 한 것을 보면 노래 잘하는 그들이 정말 많이 부러웠던가 보다. 어디 그뿐이던가. 

 학창 시절 조용하던 친구를 만났더니 통통한 그녀는 발리댄스를 오랫동안 배우고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유연한 동작으로 이국적인 터키 음악 음률에 맞춰 율동하는 것을 보고 정말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던가 우스꽝스럽지만 탱고를 추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있기는 하다. 이 또한 경쾌하면서 딱딱 꺾기는 음률에 반해서 탱고를 추고 싶다는 간절함이다. 

 이제 음악을 즐기는 종류와 방법을 초월해 점점 더 가까이 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뿐 여전히 소극적이니. 그런데도 성향에 맞지 않게 적극적인 음악 활동을 소망하는 것은, 그들의 적극적인 표현에는 따라 할 수 없는 묘한 아찔함이 있어서다. 해서 특별히 놀 거리가 없어 재미없고 따분한 나에게 음악이 있다는 것은 고맙고 참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래저래 세상에 음악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사나, 생각만 하는데도 고개를 흔들게 한다. 세상 두루두루 모두에게 위안과 평화를 주는 음악. 노벨평화상은 음악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얼마 전 걷지도 못하면서 뛸 생각에 손가락 두세 개만 한 오카리나를 더 구입했다. ‘삐리릭 휘리릭 휘릭’ 하는 고음이 이른 아침 가까이에서 들리는 새소리 같아 가슴이 뛴다. 그 맛에 다시 두 손바닥보다 더 큰 녀석까지 두게 되었으니 그 또한 바리톤 맛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다짐한다. 열정적인 음률, 다음엔 탱고다!

 음악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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