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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Jan 26. 2022

  K에게


  

1

 나는 네가 부럽고 너는 내가 부럽고 어쩌다 나는 네가 가엾기도 하고 너는 내가 가엾기도 할 테지. 지금은 그렇게 문득 네가 가여워, 하던 일을 잠깐 쉬고 너한테 편지나 보낼까 한다. 뭐가 가여우냐고 나한테 따지지 마라. 나한테 부러울 것이 뭐 있느냐고 나도 따지지 않을 테니까. 모처럼 강화에 갈 계획이었는데 황사가 아주 심하다. 곧 네가 온다 하니 강화 갈 일이 미루어진 것은 잘 된 것 같다. 

 늦은 밤부터 비가 오는 것 같더니 밤새 소리도 없이 왔나 보다. 이른 아침 베란다 창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니 벚꽃과 안개처럼 뿌려진 백목련이 도로 위에 나란히 누워 있다. 봄꽃이 핀 지 언제라고 벌써 가고 만다. 하긴 모든 청춘은 그렇게 가지. 가끔 가버린 시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때가 있지 않던? 

  이유는 모르겠다. 서러워서 눈물이 나는 것도 같고 나 버리고 간 것이 분해서 인 것도 같고, 다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서도 같고, 지금이 너무나 소중해서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를 모르는 것이, 내가 아까워서 눈물이 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정말 그래 선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랬으면 해서가 아닐까. 그래, 그게 맞다! 정말 후회스러울 만큼 다 하지 못한 일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2

 지금은 월요일 인(寅) 시쯤이다. 어제는 잘 쉬었냐. 식구가 모두 있는 일요일이 그렇듯이 나는 하는 일 없이 번거롭고 분주했다. 요 며칠 동안은 아주 폭염이었지. 더위도 타지 않는 데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 귀신 체질이라 살인적이라는 밖의 기온을 체감하지 못했으나 덥기는 덥더라. 

 그런데 지금은 비가 억수같이 온다. 그곳에도 이곳처럼 이렇게 비가 많이 오고 있을까. 네 창문 밖 채마밭 안녕이 궁금하다. 오늘부터 장마란다. 철없이 기다리던 긴 장마가 시작되었다는데 그저 뒤척이기만 할 뿐 통 잠이 오지 않는다. 이래저래. 

 곤한 잠에 빠진 옆 사람 새근대는 소리에 난 잠을 이룰 수 없고 쫙쫙 소리 내며 퍼붓는 빗소리에도 못 이루겠고, 푸른 번개와 고함치는 천둥소리에도 못 이루고 아무래도 오늘은 꼬박 날을 새워야 할 것 같구나. 

 어제, 저녁 무렵 오이지를 담았단다. 장마에 대비해서지. 조금 전 괜히 잠이 오지 않아 절여지지도 않은 오이를 뒤척이다 보니 갑자기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들겠지. 그런데 그것이 왠지 싫지 않더구나. 아니 아주 좋은 기분이었어. 넉넉함 같은 것. 아무튼 다음 달 중순께나 장마가 끝날 것 같다니 귀찮은 것은 귀찮은 것이고 설레는 것은 사실이다. 아, 내일은 만만한 자유로나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 빗소리나 들으면서. 아 참, A는 만나봤니?     

3

 햇살 한 줌 그리운 오후다. 이 가을이 다 가고 만 것인지 어느새 겨울인 것 같다. 잠깐 걷고 있는데 바람에게선 매콤하면서도 쌉쌀한 향기가 났다. 마음은 그렇지 못했는데. 그 바람에 속지 말아야겠다. 어쩌면 비라도 오려고 하는지 주위가 어둡다. 네가 있는 그곳은 어떨까, 너와 그곳이 그립다. 여전히 분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느냐. 그렇다면 아직도 너에게 열정이 있다는 것이니 인생의 기회는 또 있을 것 같구나. 반가운 일이다. 그래도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예기치 못한 골목에서 쓸쓸함과 외로움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겠니.

  거리를 지나다 보니 한 곳으로 몰려 있는 노랗고 붉은 낙엽들이 가는 시간의 뒷모습인 듯해서 다소 쓸쓸하기는 했지만 보기에는 기분이 좋다. 올해는 유난히 단풍이 고운 해다. 내 생전에 몇 번이나 가을을…. 누군가 오전에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래,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러니 한 번을 열 번으로 사는 수밖에. 무엇이든 한 번을 열 번처럼. 일 년을 십 년처럼. 더 뜨겁게, 더 아파하며. 어때, 괜찮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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