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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Jan 30. 2022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모처럼 연극 한 편을 보고 왔다. 송년을 며칠 앞두고 있던 터라 설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후배가 출연하는 극이었고 또 다른 후배의 초대라서 설렘이 더 했다. 눈길을 뽀독이며 극장까지 가는 길은 후배의 손을 잡아서였는지 따뜻했다. 평소 소리 없이 나를 훈훈하게 해주는 후배다.

 그런데다 ‘한 번 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에 마음이 흔들렸다. 오랜만에 보는 연극 이어서라기보다 기억에서 이제 영 사라졌다 싶었던 오래전 사랑이 순간 향수처럼 그리웠는지 모른다. 남들 다 하는 그 흔하다는 사랑이라는 것을 누구들 못해본 이가 있겠는가마는 아직도 사랑이라는 말에, 그것도 ‘한 번 만 더’라는 간절함에 슬쩍 두근대었던 것을 보면 사랑은 여전히 놓아 버리지 못할 꿈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제목만큼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70대 노인들의 푸념 섞인 넋두리가 관람하는 동안 조금 무료할 정도였으니 이미 마음먹고 간 기대는 접어도 좋았다. 이혼 후 혼자 살다 먼저 간, 한때 잘 나가던 방송국 PD의 상가에 방송작가, 배우, 전직 은행 지점장인 친구들이 모였다. 그들은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가정에서 사회에서 낙오되었다 여기는 신세를 한탄한다. 좋았던 옛날을 아련히 추억하는데 힘센 남성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할 때는 지금에 와서 고백이라기보다 과장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코믹한 데다 그리 부도덕해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서다.

 늦게 도착한 전처는 절실하게 애도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다소 복잡함이 서린 무표정이다. 잠깐 스치는 표정에서 연민이었지 결코 냉소(冷笑)나 조소(嘲笑)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고인과의 관계를 토로하다 방송작가와의 묘한 분위기를 언뜻 비친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로 받은 상처를 남편 절친으로 위로받았음을 알 수 있다. 70대가 된 그들이 30대에 들어 청춘이라 할 즈음 겪었을 만한 고뇌다.

 연극이 노년층의 슬픈 자화상 같다는 생각을 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직 올 것 같지 않은 70대를 직감할 수 없어서인지 충분한 공감을 얻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이것이 교만 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또 무언지 모르겠다. 눈 깜짝할 사이 지천명을 보냈고 다시 이순이 내일모레 곧인 것을 보면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크게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70도 그리 멀지는 않았을 테니 정작 남의 일 같지는 않다.

 나이 듦에 대하여 생각해 보곤 한다. 해가 바뀌자 온갖 매체에서 100세 이상이 될 노령화 가속에 심각성을 두고 야단들이다. 축복이냐 재앙이냐 겁을 주며 다투어 보도하는 것도 부족한지 ‘죽지 못해 산다’는 자조적인 표현까지 등장한다. 축복이든 재앙이든 그날은 숨 갚게 오고 있다. 축복이 되도록 지금부터 준비하라는 의미이겠지만 이미 노년을 앞둔 세대는 그동안 노년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축복보다는 재앙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기에는 남은 삶도 귀하고 소중하다. 오히려 나이 듦이 언제나 소중했고 귀하고 싫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대부분 물질이 좌우하는 관계에서 무난히 소통하며 축복처럼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 멀기만 한 일이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에 살살 초라해지는 것은 어쩌면 물질이 아니라 권태와 고립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고령화 사회에 그들만의 밝은 놀이와 문화가 필요한 이유이지 않을까.

 따르는 노시인 중에 70을 훌쩍 넘어 80을 바라보는 분이 계시다. 여전히 소녀 같기도 하고 어린이 같기도 하면서 곱다는 표현보다 외람되나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지니셨다.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매번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런데 그분이 연애소설 연작에 몰두 중이시다. 연전에 이미 자전적 연애소설을 발표한 이후이다. 실전을 경험으로 준비 중이신 것을 보면 그분은 여자이시고 문학의 생명력이 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노년과 문학적 모럴이 되기 충분하다. 

  드라마는 장례를 마친 그들이 합세해 극단을 만들기로 하면서 자기기만 같은 희망으로 끝난다. 그러면서 이제 슬슬 나도 그날을 위해 무언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어느새 노년이라는 타이틀이 코앞에 왔다는 반증이다. 연극은 참 헛헛했다.

 ‘한 번 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다소 세속적이다. 그렇기는 해도 지금처럼 공허할 때 혹시 모를 ‘그런 날’을 남몰래 상상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돌아오는 길에 인생에는 기억하는 사람과 꿈꾸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전처의 대사가 머리에 오랫동안 뱅뱅 거렸다. 문정희 시인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잊지 못할 사람’과 폭설에 묻히고 싶다 한 '한계령 연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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