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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Feb 03. 2022

장미의 도시

   

 아침 10시. 밤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가득했던 골목이 물탱크 소리로 상큼하다. 대략 이 시간이 되면 ‘솨아’하는 싱그러운 소리와 함께 널려 있는 담배꽁초며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하수구를 통해 회오리처럼 빠져나간다. 보고 있으면 그 모습이 참 색다른 풍경이다. 

 딸아이가 사는 동네는 중심지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는 곳에 있다. 더구나 창밖 거리는 젊은이들이 자주 가는 클럽이 있어 늘 시끄럽다. 게다가 어제는 이곳의 명물이라는 축구팀이 우승을 했다고 해서 얼마나 요란스럽던지 우리까지 목에 휘장을 둘러 줘야 할 것 같은, 말 그대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때쯤 나도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아침 청소에 들어간다. 이불을 털어 난간에 걸친 채 음악을 들으면서다. 아이를 등교시켜놓고 기분 좋을 시간이다. 이런 기분이 얼마 만인지. 그런데 갑자기 오늘따라 조용하던 골목에 누군가 큰소리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개의치 않고 시트 터는 일을 계속하고 있으려니 바로 우리 집 창 아래까지 까만 피부의 그가 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올려다보고 있다. 가만히 보니 내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 분명하다. 깜짝 놀라 후다닥 돌아섰다. 그때부터 한참 동안 가슴이 콩닥대어야 했는데 누군가 현관을 두드릴 것만 같아서였다.

 돌아온 아이에게 물었더니 이곳에서는 발코니에 빨래를 널어서도 안 되고 물건을 놓아서도 안 되고 먼지를 털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한다. 지금껏 모르고 쭉 해왔던 행동인데 오늘 그만 딱 걸린 모양이다. 에이! 모처럼 볕 좋은 날이면 빨래를 탈탈 털어 좀 더 오랫동안 널어 둘 생각이었건만.  

 아이가 사는 툴루즈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거의 되어간다. 이 도시는 프랑스에서 서너 번째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넓지 않다. 거리를 서너 시간 홀로 구경하고도 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올 정도다. 로마보다 오래되었다는 로맨틱하면서도 숙연한 이곳은 온통 은은한 붉은빛의 벽돌과 지붕이 중세를 느끼게 한다. 두 차례 세계대전까지 비껴 간 덕분에 100년이 더 된 건축물은 너무나 흔하고 수백 년 된 집을 여전히 주거로 사용하고 있다. 집값을 뛰게 하는 우리와 같은 재개발이란 상상할 수 없다. 호기심에 대문을 통해 들여다보면 놀라움에 신기함까지 더한다. 중세 수도원 같은 성당이 유난히 많은 것도 이들의 자존심에 한몫한다는 느낌을 준다.

 수백 년 된 공동묘지도 무척 인상적이다. 그 시절 묘비에 박힌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18세기 영화 속의 배우를 보는 듯하다. 가족묘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남편과 아내가, 형제가 함께 있기도 하고 모두 함께 있기도 한 것을 보게 된다. 덜 외롭고 덜 무서웠을 그들을 생각하면 죽음도 그리 두렵지만은 않은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무덤에 문이 있다는 것인데 의아하기도 하다. 묘지의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거나 훼손되어 열려 있는 문을 보면 섬뜩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오래된 나무와 정교한 조각들과 화려한 꽃이 공원처럼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내려오다 문에 관해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그 시절에는 그랬단다. 열고 들어오라는 것인지, 들어가도 된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툴루즈 시내를 지나다 보면 여러 마리 개를 끌고 다니는 비루한 이들을 자주 본다. 가다 보면 광장에서 만났던 이를 공원에서 만나고 다시 역사에서 보는 경우가 있다. 신기하게 동물도 부양가족이라 하여 정부로부터 마리 숫자대로 보조금을 받는다고 한다. 굳이 일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게으른 사람들의 복지천국이다. 그러니 프랑스가 기업이라면 이미 폐업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딱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도 툴루즈는 아름답다. 참 예쁘다. 혼자 걷다 보면 이곳 거리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중세 도시다운 아기자기한 좁은 골목 안은 구경거리로 넘치고 시루떡보다 작은 까만 돌들은 바닥에서 반질거린다. 그러니 몰래 가방에 넣어 우리 동네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결코 화려하지 않으면서 품위와 고급스러움이 자칫 초라할 수 있는 공방들을 돋보이게 한다. 악기를 만드는 지저분한 공방 귀퉁이에서는 여학생 한 명이 아무렇지 않게 레슨을 받고 있고 어지럽게 널려 있는 손바닥만 한 보석 세공장의 주인은 이름난 장인이다.

 골목 조금만 들어가면 눈길 가는 곳마다 가슴 들뜨게 하는 것이 있다. 오래된 붉은 벽돌담과 아주 잘 어울리는 작은 꽃집과 수예점, 박물관과 갤러리는 조그만 동양 여자의 넋을 빼놓기 충분하다. 어디든 가는 데마다 가지고 싶은 것, 그러나 대부분 가질 수가 없는 것이 그곳에는 넘쳐났다. 그러니 눈에 가득가득 넘쳐나는 것을 넘치게 담기 바빴다. 

 이제 골목 조금만 나서면 자유로운 노천카페들이 유럽을 느끼게 한다. 우연히 길을 지나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크로와상을 먹으면서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에 감동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잔을 만지작대며 사람들을 오래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다. 나도 그들처럼 멋지게 담배 연기를 품어 보는 상상과 함께면서 다. 바라보고 있으려면 많은 여자들이 길에서나 어디서나 스스럼없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놀랍고 아무렇지 않은 차림에도 하나같이 멋스럽다는 것이 놀랍다. 모두 스타일이 다른 개성이 젊은이와 노인의 경계를 잊게 한다. 역시 그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에게 와서 가장 먼저 챙겨 준 것은 청소기와 수납박스다. 아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간의 생활이 한눈에 보인다. 얌전하게 정리를 했다고는 하나 번듯한 가구 하나 없이 구석구석 검은 봉투며 여행용 가방마다 소지품을 수납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벼룩시장에서 집시 여인이 파는 천을 잔뜩 사와 바느질을 하고 있다. 아마 돌아가는 날까지 아이 방을 가꿔주고 있지 않을까. 처음 살림 난 방을 꾸미듯 재봉틀도 없이 손끝이 노래질 정도로 마름질을 하고 수를 놓고 있는 지금. 나, 딸아이. 우리 둘은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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