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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Mar 06. 2022

 차 한잔 하실래요?

     

 수십 년을 애지중지 소중히 다루고 있는 머그잔이 두세 개 있다. 소중히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끼고 사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 선물로 받은 머그잔은 마치 은은한 작품처럼 보여 아직 그저 멀리서 감상하듯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짐작대로 모두 아끼는 오래된 벗들에게 받은 나름 애장품이다. 주변 이들에게는 단지 머그잔일 뿐인데 나는 그렇다. 


  집들이에 들어온 흔히 진열만 하는 고가의 잔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냥 머그잔인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사용을 오래 하고 자주 했는지 하나는 잔 속이 찻물로 퇴색할 정도다. 그런데도 찻잔에 차를 담아 들 때는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감싸는 버릇이 생겼고 그 순간은 정말 아련하고 심신이 안정을 찾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특별한 이가 아닌 다음 오로지 내 전용 찻잔들이 된 까닭이다. 


 대체로 화려한 것을 유별나게 마다하는 편이다. 유채색보다는 무채색이고 금보다 은이 편하다. 튀는 것보다는 눈에 띄지 않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듯한 것이 좋다. 현대적이고 도회적인 분위기보다 근대적인 것에 마음이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마 스스로가 화려하지 않아서 일지 모르겠다. 간혹 반대 성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주 아니다. 내게 부족한 것에 대한 부러움, 혹은 두근거림도 때때로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낀다는 머그잔 하나가 그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친구의 취향이 그와 같아서다. 평소 그녀의 취향이 싫지는 않았지만, 따라 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차 한잔 하자는 제안에 5분 거리 복장으로 여유 있게 들렸더니 화려하다 못해 요염한 찻잔이 식탁에 서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서 있다’고 한 것은 정말 서 있어서였다. 흔히 머그잔이라고 하면 엄지와 검지를 펴서 약간 굽힐 정도의 길이에 불룩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내 큰 엄지와 중지를 쫙 피고도 남을 정도 길이에다 순백의 살결이 순결하기까지 했다. 그것에다 소피아 로렌의 해바라기처럼 딱 그 모습 그 색깔로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었다.


 확 들어오는 매력에 빠져 가까이 갔더니, 어머나! 샴페인 잔 만한 주둥이 주변에 결코 좋아하지 않던 금색이 손잡이까지 섬세하게 둘러 있지 않은가. 그에, 샴페인 잔처럼 가느다란 몸이 요염하다 할 만큼 매끄럽게 타고 내려오더니 거의 바닥에 떨어질 때쯤 안정감 있게 들어가 금색 테두리를 한 밑동에 다시 받침을 만들었다. 금색을 두른 아기 손바닥만 한 찻잔 받침 또 한 귀부인을 보필하는 시녀처럼 귀품 있고 은은하다. 마치 바로코 시대 어느 귀족의 찻잔인 듯싶었다. 


 그것이 한 쌍임에도 탄복해 마지않는 벗을 보아서인지 해바라기 머그잔 하나를 단숨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하나 너 가져, 한다. 그렇게 시작된 애지중지, 내 머그잔이 되었다.   


 또 하나 머그잔 하나. 북미 캐나다 동부에 있는 벗에게 온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밥을 거르고 커피로 하루를 날 수 있는 나를. 그런 나를 위해 1989년, 캐나다에 도착 후 바로 보내온 것이 에스프레소 잔보다 조금 큰 자그마한 찻잔이다. 멀리서 왔다지만 동네 선물코너에서 만날 수 있는 그저 작디작은 귀여운 머그잔일 뿐이다.


 해바라기 잔 반 크기도 되지 않는, 위아래가 같이 둥근 형태다. 아무 데나 올려놓아도 탁, 하니 안정감을 준다. 잔 길이만큼의 손잡이 또한 사랑스럽다. 표면에는 해바라기 대신 자그마한 다람쥐가 수풀 사이에서 눈을 굴리며 알밤을 까느라고 분주하다. 잔을 돌려가며 그림을 보는데 마치 파노라마처럼 이야기가 펼쳐진다. 은방울꽃 덤불 아래 나지막이 보라색 제비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편, 토끼풀 위로 이번에는 벌이 날갯짓에 바쁘다. 


 찻잔 안의 표정도 미소 짓게 한다. 또 다른 다람쥐 하나가 그도 주인공 인양 잔을 바라보는 나에게 재롱을 부리고 있다. 포장을 뜯자마자 사랑스럽고 귀여워 두 손으로 감싸 가슴에 품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나와 하나가 되어 마냥 이야기를 주고받는 찻잔이 되었다. 


 또 다른 잔 하나. 아직 조심스럽고 소중해 바라만 보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사용할 준비가 덜 된 탓이기도 하다. 다람쥐 잔을 보내준 친구에게 어느 날 또 내게 온 녀석이다. 언젠가 통화 끝에 난 이 잔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30년을 훨씬 넘겼지만 여전히 소중하게 아끼고 있다는 상징으로 이제 색까지 바랬어, 했더니 이건 어때? 하며 득달같이 보물처럼 보내왔다. 


 평범한 크기에 올라갈수록 몸통이 퉁퉁한 잔인데 내가 좋아하는 청색이 채도를 다르게 모양 없이 굵게 붓질되어 있다. 하얀 백자에 고고하리만큼 위엄이 있다. 결코 화려하거나 엄청난 고가는 아닐 터이건만 편하게 사용하면 함부로 다루는 듯해 마치 흰 장갑이라도 끼고 작품을 다루듯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느낌이 왜 그렇게 좋은지.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같다. 


 종종 사람들을 만났을 때 서로 다른 데서 오는 이질감이 서로를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편해서 늘 가깝던 사람도 나와 다른 강한 취향을 보는 순간 낯설고 서먹서먹한 것도 그래서 일 테다. 별로 가깝지 않던 이에게 순간 나눌 수 있는 취향을 보았을 때 친밀감 또한 어쩔 수 없지 않던가. 마실 때마다 나를 새롭게 채워 주는 머그잔들이 그렇다.


 요즘같이 불안한 시국을 잠깐 잊게 해 줘 행복한 것은 덤이니, 오늘은 바라만 보던 프루시안블루가 강한 저 잔과 조우하기 정말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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