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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Apr 24. 2022

누구에게나 권력은 있다

  나한테는 카리스마라고 하는 기질이 없다. 스스로 참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이유인지 카리스마라고 하면 강한 선입견이 먼저 떠올라 거부감부터 오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개인은 물론이고 간혹 사회와 국가를 지배하는 자의 카리스마가 권력으로 와 독재와 독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으로 오는 물리적 횡포가 피를 부르는 폭력까지 동원하고 말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다. 


 그럼에도 그런 신념이 한순간 무너지는 것도 역사와 작품을 통해 보아 왔다. 최근에 다시 본 ‘타인의 삶’에서도 그랬다. 불가항력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또한 순응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을 그렸다. 통독 전 동독이 배경이다. 암울하고 음습한 화면이 시작부터 끝을 알려주는 듯했지만 아름답고 따뜻한 영화이기도 했다.


 공산국가에서 창작 활동이란, 국가의 이상을 숭배하는 작업이 아니라면 예술가는 파멸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예술을 지키려는 예술가들과 그들을 감시하고 파악해 일거수일투족 정확히 보고 해야 하는 자들의 게임 같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면서 두 관계의 갈등이 소스라칠 정도로 서서히 변하는데 그 과정이 소리 없이 애달프고 경이롭다. 


 이야기 구성은 타인의 시선으로 타인의 삶과 사랑을 들여다보는 흔히 말하는 몰래카메라를 수단으로 한다. 비밀경찰인 감시자는 맹목적인 국가의 충성심만으로 사랑하는 두 예술가의 삶에 끼어들면서 그들은 완전한 세 사람의 타인으로 만난다. 


 영화는 무심하고 기계적으로 흐른다. 그러면서 도청과 감시를 감정 없이 들여다보던 냉정한 감시자는 조금씩 권력자의 명령에 회의를 가지고 두 사람도 모르게 그들을 돕는다. 그러다 연인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의 죽음을 보아야 했고 자책은 차가운 도청자의 삶을 따뜻한 인간으로 전환시킨다. 


 결국 마지막 예술과 작가를 지켜준 것은 피해자일 수도 가해자일 수도 있는 감시자 그였다. 가곡으로만 듣던 무거운 독일 억양을 팝송으로 들으니 둔탁함의 매력이 가슴을 뛰게 한 것도 굉장히 압권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는 현장감에 전율을 느껴야 했다. 감시자에게 바치는 작가의 책을 포장해 서점을 나서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차갑고 무표정했지만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장면이다.


 사람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겁한 심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이들을 정의롭다고 칭찬한다. 가끔 약자 혹은 강자의 자리가 모호할 때가 있다. 어쩌면 약자 앞에 약한 그들 역시 묘한 카리스마에 의한 권력을 소리 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서다. 


 혹자들은 절묘한 상황에 내보이는 강한 카리스마에 야릇한 매력을 느낀다고도 말한다. 사실 지금처럼 어른스럽지 못했을 때 주변을 이끌고 시선을 압도하던 대상에게 호감을 가진 적이 있었으니 나무라지는 못할 일이다. 생각하면 아찔하고 위험한 판단이었다. 


 어쩌다 강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가까이 가기가 꺼려진다. 그러면서 더 강한 무엇으로 그를 넘어뜨리고 싶기도 하는 것은, 혹시 내게 있을지 모르는 강성에 대한 피해의식은 아닌가 짐작해 본다. 약자와 강자를 규명하기는 진정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을 부러뜨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강한 것이 폭력이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은 듯하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감시자 비즐러, 그가 아니면 누가 이 역할을 했을까. 누구에게 선물할 것이냐는 점원 말에 “아니요, 이 책은 절 위한 겁니다”. 무표정하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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