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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비군 Jul 02. 2019

[단편] 재회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겨울을 앞둔 늦가을 초저녁에 부는 바람은 매섭고 차갑다.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은 대가로 나는 양팔로 몸을 감싸 안으며 움츠려야만 했다. 하지만 일기예보를 확인했어도 내 옷이 달라지진 않았을 거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내가 가진 유일한 슈트니까. 


그녀에게 연락이 온 건 이틀 전이다. 2년 만에 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시간은 모든 걸 무디게 만든다. 반갑지도 않지만 그렇게 싫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기뻤다. 그저 기뻤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헤어진 이후에도 내가 망가지지 않았음을, 모든 면에서 나아졌음을 가장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조금 아니 많이 짜증 났을 뿐이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곳은 강남이나 종로가 아닌 어느 서울 구석의 조그마한 찻집이다. 가진 게 없던 우리는 서울 구석진 곳, 작은 동네, 작은 찻집 구석에서 동네 비디오방에서 본 옛날 영화 얘기를 하면서 시시덕 거리곤 했다. 내 손은 쉴 새 없이 그녀의 치마 속을 훑었고 그녀는 밀쳐내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가끔씩 입맞춤을 해줬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비루함을 방어하기 위해 온 몸을 냉소로 두르고 지식인 흉내를 내고 다니던 얼빠진 놈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런 나에게 호기심이 들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아주지 않으면 금방 얼어 죽을 것 같은 작은 고양이처럼 보였거나... 어쨌든 그녀는 나와 독한 소주를 몇 병씩 나누어 마시며 마치 외계인이나 된 것처럼 인간세상을 비웃는 나를 비웃지 않았고 그 허세 가득한 냉소조차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날 나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밤새도록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그녀의 몸에 엉켜 들었다. 그리고 그날로 나는 그녀의 자취방에 들어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이후부터 그녀와 함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그날을, 그 열락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날은 다시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자취방에 들어간 이후 수개월 동안 십여 번의 면접을 거쳐 겨우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고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곧 조그마한 변두리 예식장에서 결혼을 했으며 7개월 만에 이혼을 했다. 27년간의 감옥생활과 고문, 중노동을 버텨낸 넬슨 만델라도 결혼생활은 6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난 그보다 긴 7개월을 했으니 어떤 면에선 내가 나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위안했다. 


단지 버틸 수 없었을 뿐이다. 냉소, 비웃음, 무관심으로 나 자신을 계속해서 방어할 수는 없었다. 방어막을 치우면 나는 단지 바삭거리는 소리 때문에 밟고 싶은 바싹 마른 나뭇가지, 낙엽 따위일 뿐이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비명이었다. 우리는 결혼 3개월 만에 각 방을 썼고 7개월째 이혼했다. 


그녀는 무슨 일로 연락을 했을까? 번듯한 회사에서 비서로 근무하던 그녀가 갑자기 보험설계사가 되진 않았겠지. 나에게 미련이 남았을까? 내심으로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짐 싸서 나온 건 나였으니 그녀가 돌려달라고 할만한 물건이 나에게 남아 있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났다. 약속시간 20분이 지나 집에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입구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들어온다. 긴 생머리와 긴 다리는 여전하다. 짧은 스커트에 얇은 코트를 걸친 그녀를 표정 없이 바라보기 위해 턱에 힘을 줘야만 했다.  


그리고 난 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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