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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비군 May 27. 2020

일을 미루는 이유

하얀 파워포인트 화면을 열어놓고 멍하니 앉아있다. 머릿속에는 콘텐츠에 대한 고민과 함께 날씨, 영화, 주식, 정치, 가족, 점심메뉴까지 온갖 생각이 뒤섞여 부유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다.


'일하기 싫다.'



지구는 광활한 우주공간 속의 티클보다 작은 단 하나의 오아시스다. 칼 세이건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에 실린, 약 60억 km 떨어진 거리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푸른 점이다. 그 푸른 점이 살아온 45억 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이제 막 태어나 자라기 시작한 생명이며, 광대 무비 한 공간과 수십억 년 단위의 우주적 시간 속에 다만 찰나를 살아가는 존재다.


하지만 우리 각자의 우주는 거대한 우주적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다. 우리 개개인은 일터, 가족을 포함한 각자의 작은 세계를 살아간다. 나의 우주는 근 20여 년간 종로에 있는 회사, 가족과 함께 사는 집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세상은 70억 명 각자의 우주와 시간이 연결되고 중첩되고 맞물려 돌아간다. 서로의 세계는 부딪히기도 하고, 통합되어 하나의 우주가 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각자의 작은 세계를 살아가는, 거대한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다. 내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의식은 수십 년 안에 영원히 사라지겠지만 나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은 불멸의 시간을 존재하게 될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우주적 시공을 생각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진다. 우리가 하는 일은 개미의 채집활동이나, 소가 여물을 씹는 행동과 별 차이가 없다. 지구에 존재하는 수조 개가 넘는 생명의 생존활동 중 하나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순간 업무를 미루기 위한 핑계를 생각하는 동안 그냥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항상 후회는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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