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에서 계획을 세운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업무가 계획을 수립하고 실적과의 차이를 분석, 보고하는 것이다. 계획은 끊임이 없다. 5년, 3년, 1년, 월, 심지어 주 단위까지 계획은 수십 번씩 수립되고 삭제되고 갱신된다. 계획에는 시간 단위를 기반으로 소요자원과 경제적 이득이 수치화된다.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되 나름의 합리적인 궤적이 그려져야 하며 스토리를 담아야 한다.
인간이 주도하는 세상만사 대부분 계획이 있다. 터무니없는 계획도 있고 합리적이고 단단한 계획도 있다. 정부나 회사는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짜며 자본과 인적자원을 할당한다. 종교, 비영리단체, 학교, 연구활동 등등 세상에서 계획 없이 이루어지는 건 없다. 개인 역시 마찬가지다. 매년 뻔히 못 지킬 걸 알면서 세우는 새해 계획부터, 운동 계획, 여행 계획, 주택마련 계획, 커리어 플랜, 결혼계획 등 계획은 끝이 없다.
계획의 출발은 목표다. 목적성을 가칠 때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며 전략의 실천이 계획의 근간이다. 목적성은 본질이며, 본질의 추구는 자아의 도구화에 이른다. 기업은 이윤추구의 목적을 가지며, 정부는 공동체를 지키고 유지하는 목적을 지닌다. 종교나 학교 등 다른 단체들도 마찬가지로 나름의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이 아닌 실존적 존재다.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진 의미 없는 존재이며, 주체적으로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낼지 선택하고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존재다.
반면, 진화적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유전자, 즉 복제자를 퍼뜨리는 목적성을 가진 운반자(vehicle)다. 인간 역시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운반자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적응적 진화를 거쳤다. 우리는 유전자를 보존하고 전파하는데 최적화된 운반기계로서의 목적성을 가진다. 그렇게 나는 생명의 일원으로 진화적 목적을 가짐과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선택을 통해서만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입체적 실존적 주체이다.
이미 두 아들에게 유전자를 전달함으로써 진화적 목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본질에 우선하는 실존적 자아를 온존 하기 위한 삶의 주체적 선택을 이루기 위해 나는 나의 본질을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삶의 목적성을 제거하고 선택을 통해 실존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이다. 삶은 고난이다.
내가 무계획인 이유는 그래서다. 이 글을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냐'고 묻는 아내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