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탱해 준 글쓰기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반은 발표하기 위해서 손을 들고 “00가 될 000입니다.”를 외쳐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고 나니 그 시절 각자가 품었던 꿈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지 않으셨을까 어렴풋이 헤아리게 된다. 덕분에 지금도 손을 번쩍 들었던 13살의 내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작가가 될 000입니다.”
얼마 전 선생님들의 커뮤니티 모임에서 <차이 나는 클라스> 문해력 편을 보았다. 입시 현장에 있다 보니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의 문해력이 감소하고 있음을 체감하고 무엇보다 의사소통에서 생기는 문제가 문해력의 문제인지, 세대차의 문제인지 알고 싶었다. 해당 편의 읽기&리터러티 전문가로 나오신 조병영 교수님은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공감능력이라고 정의하셨다. 대부분 문해력이란 읽는 능력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텍스트를 읽어 나의 앎을 나의 말로 만드는 것, 나아가 상대의 글 읽고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공감능력까지 모두 포함하는 영역이라고 하셨다.
그날 모인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은 공통적으로 아이들이 자기 의견 말하기를 어려워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진로 수업 혹은 영어회화 수업에서도 의견이 없으니 진행이 어렵다 하셨다. 나 역시 아이들이 직접 영어로 쓰인 텍스트를 읽은 후 한글로 주제와 글의 흐름을 정리하게끔 하는데 많은 아이들이 “글을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가 다반사다.
조병영 교수가 말씀하신 나의 말을 만드는 것이란 내 것인 생산물을 만드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 결과물이 음악이든 영화든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건 능동적 행위의 투여를 의미한다. 시간과 에너지, 무엇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해나가는 의지와 수고스러움은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지속될 수 없다.
작가가 되길 꿈꿨던 나의 경우 아주 오랫동안 계속해왔던 것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치열하게는 아니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던 순간, 선명하게 기억되고 싶은 좋았던 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놓아버렸던 시기에도 듬성듬성 비밀공간에 글을 썼다. 지난달 과거를 들여다보는 글쓰기 리추얼을 하며 새롭게 알게 된 나의 모습 중 하나는 나는 혼돈의 소용돌이에도 흐름을 놓치지 않고자 성실함으로 마주한다는 것이었다. 괴로워하면서도 고난은 즉시 하고, 감정의 근원은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 그 과정을 성실하게 임할 수 있었던 건 글쓰기를 통해 감정을 해소해 왔기 때문이었을 거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때문이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내가 기록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중략)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은 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행동이다. 나약하지만 그 나약함 안에 힘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살겠다는 확신. -<배움의 발견>
저자처럼 나 또한 일기를 쓰며 감정을 배제한 채 사건만 나열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건을 복기하며 결과의 원인을 나에게 찾고, 또 새로이 다짐을 하곤 했다. 청자 없는 종이 위에 글로써 토로하며 내가 나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내 안의 자존감의 무게가 의지의 무게를 지지하지 못할 땐 이 마저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쓸인잡’에서 이호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일기를 쓴다는 건 자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마음이 깃든 행위라는 것, <배움의 발견> 속 기록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행동,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닌 자기 자신 안에서 살겠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라는 문장들은 내 안의 주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글쓰기를 지속해야 할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