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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19. 2023

견고함에서 느슨한 취향으로

물건이나 공간에 쉽게 질리지 않는 편이다. 익숙한 공간에 들어갔을 때 예상가능한 배치와 분위기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커피는 언제나 아메리카노, 산책코스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딱 적당한 거리의 늘 다니던 길. 각 계절별로 돌려보는 드라마가 있으며 기분에 따라 듣는 아티스트의 목소리가 한결같다. 나에게 취향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여 최대치의 만족감을 주는 것이기에 한 번 마음을 빼앗긴 것에 충성도가 높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없고, 무언가에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얼마 전 10년을 사용한 이불커버를 버리고 새것으로 구매했다. 주기적으로 세탁과 건조에 공 들인 덕택인지 사용한 시간에 비해 품질면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 오랫동안 사용했다. 독립 전 본가에서 부터 아껴온 물건이다 보니 정이 들기도 해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날이 포근해지면서 침구를 교체하던 차에 언제나처럼 예상 가능한 침실의 풍경에서 ‘기대감’의 부재를 느꼈다. 깨끗하게 잘 말린 보송보송한 침구 위에서 잠들 그 감각은 10년을 반복해 온 경험을 통해 이미 피부로 예측 가능했다.



물건 하나를 새로 들이면 하자가 생기고 나서야 놓아주는 사람이기에 들일 때에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한다. 새 이불을 사야겠다 마음먹은 후에도 ‘내 것’을 마주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말 딱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날 때까지. 그런 마음으로 20대 때와는 디자인적으로 다른 취향을 골랐고, 결과적으로 예상과는 다른 물건을 들이게 되었다. 피부에 닿는 감촉을 중시하는 나는 보들보들한 면소재에 온몸을 폭 감싸는 적당한 무게감이 있는 것을 기대했으나 배송 온 상품은 그렇지 않았다. 오래 쓸 각오로 적지 않은 금액을 주고 산 이불은 호텔에 가면 접할 수 있는 바스락 거리는 얇은 소재였던 것이다. 그 순간 기대가 실망감으로 바뀌면서 환불을 고민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책과 대화를 통해 본질을 탐구했으며 그것들로 만들어 간 나만의 ‘기준과 태도’들이 일관된 나를 만들어 줄거라 믿는다. 나와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이들에게선 끌림을,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선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지나고 보니 변치 않는 취향이란 건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좁히는 허들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취향은 ‘저 사람은 나와 결이 달라.’라며 관계에 거리를 두게 하고 음악에 대한 취향은 ‘이건 MZ세대가 듣는 음악이야.’라고 하면서 나를 세대라는 벽에 가둬 두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색이 뚜렷한 사람일수록 다른 색과 섞이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새 침구의 처분을 어찌할까 고민하다 환불 과정이 귀찮아서 그냥 사용하기로 했다. 적지 않은 값을 치렀으니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품질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익숙한 침대에서 새 이불을 덮고 잔 날 예상치 못한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주는 감각은 내가 누워있는 곳이 호텔일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하게 했고, 포근함 대신 매끈한 촉감은 경험해보지 못한 만족감을 주었다. 다음날 아침 기분 좋게 자고 일어나 취향이라는 익숙함이 나를 가둬둘 수 있음을 새로운 경험을 통해 확인했다. 물건도, 공간도, 사람도. 여전히 나의 마음이 변치 않는 것들에 향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에 좀 더 느슨해지고 싶다. 10년 전의 내가 지금과 같지 않으니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도 너무 아쉬워하지 않기로. 의식적으로 허들을 낮춰 내 안의 울타리가 더 넓어지길, 하여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다채로운 사람이 되길. 견고함에서 느슨함의 취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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