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부-3. 마음 가나다 3)

3) 은수의 <마음 가나다>

by 이명희

은수(가명)는 고2 여학생이다. 국어수업 중에 만난 은수는 밝고 적극적이었다. 발표를 잘했고 수업태도가 좋았다. 국어를 좋아했다. 그런 은수가 2학기부터 결석과 지각을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와서도 잠을 자느라 수업을 듣지 못했다. 담임교사가 달래고 혼내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좋아하던 국어수업 중에도 교실 맨뒤쪽 창가 자리에서 마냥 엎드려 있었다.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다. 따로 불러서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어느 날 은수네 학급 수업 중 아이들에게 <마음 가나다>를 쓰게 했다. 은수가 용케도 깨어나 저널을 썼다. 이 저널을 통해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은수가 왜 결석과 지각이 잦은지, 왜 그렇게 잠만 잤는지를.


가지 마! 엄마!

나는 요새 정말 외롭다.

다른 애들이 가끔 부럽다.

라(아)무나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엄마아빠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바쁘게 지낼 땐 잘 모르지만 시간이 생기면 조금 슬프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아직 17살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힘들다니...

자지 말고 공부하자.

차(착)잡하지만,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깐.

카(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타이르면 뭐 하나? 또

파닭 먹고 싶다. 살찌는데...

하루하루가 안 갔으면 좋겠다. 여유가 필요하다.


은수는 쓰기 곤란한 글자를 융통성 있게 바꿔가며 14행을 다 채웠다. 은수의 <마음 가나다>를 읽으니 은수를 이해할 것 같았다. ‘가지 마! 엄마!’라고 외치는 은수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사는 게 힘들다는 17살 은수가 안쓰러워 가슴이 저렸다. 점심시간을 쪼개 은수와 상담을 했다.


여름방학 때 은수 부모가 이혼을 했다. 부모는 은수에게 방 한 칸 월세로 얻어 주고 각자 떠났다. 그렇게 떠나는 부모를 붙잡지 못했다. 1행처럼 ‘가지 마! 엄마!’라고 울부짖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엄마아빠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혼자서도 잘 지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은수는 너무 외로웠다.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부모의 잔소리를 듣더라도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방과 후 새벽 1시까지 치킨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면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외롭고 슬펐다. 몸은 지친데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다. 새벽에 겨우 잠이 들면 등교시간에 맞춰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늦게라도 학교에 가면 다행이었다.


학교에 가면 책상 위에 엎드렸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다. 자다보면 점심시간이고, 또 자다보면 수업이 다 끝났다. 그렇게 잠만 자다 오는 학교이지만 가끔은 선생님 목소리도 들리고, 아이들 목소리도 들렸다. 딴세상 소리 같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알고 있었다.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마음도 잠깐이고 학교에서 마치면 치킨집으로 일 하러 가야 했다. 친구들과 놀 시간이 없었다. 좀 쉬고 싶었다. 여유가 필요했다. 17세 삶이 고달팠다.

은수는 <마음 가나다>에 담긴 이야기를 내게 들려 주었다. 시(詩)를 해석하듯 자기 저널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저 듣고 있었다. 은수의 손을 잡고 끼니 잘 챙겨 먹으라는 말 한 마디로 짧은 상담을 끝냈다. 그 후 은수는 수업 중 깨어있을 때가 많았다. 외톨이로 있던 은수가 친구들과 모둠활동을 함께했다. 예전처럼 발표자로 나서기도 했다.


은수를 불러서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냐고 묻지 못했다. 하지만 은수와 눈빛이 마주칠 때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은수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 알고 있었고, 은수는 내가 자기 마음을 알고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아이들의 <마음 가나다>를 읽으면 아이들의 마음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상담에도 도움이 된다. 청소년과의 상담에서 내담자의 마음을 만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비자발적 내담자나 자발적이더라도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담자를 만났을 때, 내담자의 마음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상담자마다 다르고 아이마다 다르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10분만에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어려운 일이 <마음 가나다>를 통해 가능하다. 10분만에 마음을 만날 수 있다. 대면상담에서라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 수 있는 내면 탐색 작업을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다.


저널을 통해 아이의 마음에 함께 머무는 것은 상담자가 공감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그런데 왜 ‘요즈음 마음’일까? 사람의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다. ‘요즈음 마음’도 고정불변의 마음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마음 먹기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변화될 수 있고, 상담자가 공감해 줌으로써 변화될 수 있다.


저널테라피 워크숍에 참여했던 한 상담자는 <마음 가나다>를 쓰니 의사에게 마음상태를 진단 받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가나다 순서에 맞춰서 생각나는 대로 썼을 뿐인데 자신이 쓴 저널을 다시 읽어 보니 그동안 왜 아픈지 몰랐던 마음이 거기에 오롯이 드러나 있다고 했다. 자신도 몰랐던 마음이 어떻게 글로 쓰여질까? ‘가~하’를 따라가며 요즈음 자기 마음에 집중하는 동안, 전의식이나 무의식에 잠겨 있던 심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예상 밖의 언어가 튀어나오고 창의적 표현이 쏟아질 수 있다. 문제해결의 지혜가 떠오를 수 있다. 이렇게 <마음 가나다>를 통해 치유하는 글쓰기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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