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면 주야장창 바닷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양을 항해할 때 이야기다.
그러면 당직자는 사관 한 명과 오일러 한 명이 브릿지와 기관실에서 각각 당직을 선다.
1항기사 당직은 4시부터 8시까지, 3항기사 당직은ㄴ 8시부터 12시까지, 미드우치는 2항기사가 선다.
그러면 짝이 된 사람은 늘 함께 당직을 서므로 보는 사람은 한정돼 있다. 긴 항차는 보통 두 달이 걸린다.
호주 동부에서 석탄을 싣고 태평양,인도양,대서양을 건너 네들란드 로텔담까지 가면 58일 내지 60일 걸린다.
또 동남 아시아에서 태평양, 대서양 건서 오대호에 가는 데도 두어달 걸린다. 겨울에 오대호에 들어갔다가
물이 얼어서 배가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고도 발생한다.
같이 당직을 서는 사람이 정해져 있으므로 서로 하는 얘기를 반복하는 수가 많다.
그래도 심심하니까 들어준다. "그 얘긴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이다"고 하면서도.
카페에서 내가 하는 얘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내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던 얘기나 몇십년 전에 배 탔던 얘기 그리고 해군에 소집되어 갔을 때 얘기를
한 이십년 풀어놨으니 그럴만도 하다.
배에서는 승선 경력을 말할 때 라면을 가지고 따진다.
미드 위치를 서면 아침식사를 하지 않으므로 보통 라면을 야식으로 지급한다.
그러면 당직중에 쿼드 마스터나 오일러가 라면을 끓이는데 승선 경력이 오래될 수록 라면을 끓이는 솜씨가 늘어난다. 유능한 숙련자는 라면으로 국수도 만들고 짜장면도 만들어 낸다.
70년대초 우리가 해군에 있을 때는 쌀이 모자라 수요일은 분식날이라 해서 라면을 먹었다.
군대라면은 일반 마트에서 파는 개별포장 라면이 아니고 10개씩 알맹이만 묶음라면인데 창고에서 몇년간 묵혔는지 라면에서 군내가 났다. 여러명이 먹을 라면을 큰 솥에 넣고 끓여내면 국물도 없는 풀대죽 같았다.
오래된 냄새까지 나서 먹기가 역겨웠다. 그러나 어쩌랴?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돼지처럼 먹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걲은 보릿고개 이야길 하면, "쌀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지!' 라고 한다.
당시에는 라면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내가 라면을 처음 본 것은 아마도 64년 아니면 65년이었다(중3,고1)
처음에는 국수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몇년 후 부산으로 내려와서 돈이 없어 독서실에서 자고 끼니는 라면으로 때웠다.
매끼마다 라면을 일주일간 연속으로 먹고 나니 나중엔 라면에서 밀가루 냄새가 나면서 라면이 보기도 싫었다.
지난 14일 인천의 한 빌라에서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두 형제가 라면을 끓여 끼니를 해결하려다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형과 동생은 각각 3도와 1도 화상을 입었는데 형은 두 차례의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아 호전됐지만 유독가스를 많이 마신 동생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언론에서는 라면을 끓이다 화를 당했다 하여 라면 형제로 부르기도 했다. 형제의 어머니(30)는 이른 나이에 결혼한 후 이혼하고 두 아이를 홀로 키웠다고 한다. 임신 육아 등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형제의 딱한 사연이 알려지자 후원의 온정이 병원으로 쏟아져 19억이 모였다고 한다.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살만한 세상임을 깨우쳐 주는 낭보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