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시골에 살 때 우리집은 사랑채만 남았다. 6.25사변때 몸채와 헛간은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사랑채에는 가운대 칸에는 정지(부엌)가 있었고 양쪽으로는 창고와 안방과 청(마루)이 있었다.
몸채도 3칸 초가집이었는데 불타고 한동안 안쪽 벽만 덩그렇게 남아있었다.
나이가 들면 남자들은 안채에서 나와 보통 사랑방에서 거쳐했다.
사랑방은 몸채에서 떨어진 별채로서 주로 대문이나 사립문에 가까이 있어 바깥 출입이 용이했다.
안방은 주로 안사람 차지였다. 식사때가 되면 안사람이나 며느리가 밥상을 차려 밥상보를 덮어서 머리에 이고
날라야 하고 식사가 다 끝난 다음에는 큰 헛기침을 하면 다 먹은 그릇을 내어 가라는 신호였다.
사랑방에는 옛날 같으면 식객들을 거처시키거나 손님맞이용이었다.
얼마전 백수가 된 친구들이 몇몇이 모여 시내에 사랑방을 하나 만들자고 했다.
열한명이 십시일반으로 몇푼씩 내어 전세금을 만들고 월사용료도 내기로 한다고 내게도 같이 하자는 전화가 왔으나 거리도 멀고 나갈 시간도 없다고 사양했다. 주로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취지였다.
친구들이 모여 바둑도 두고 마작이나 훌라도 하며 인터넷도 하고 잡담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라는 데
나는 바둑이나 마작을 배우지 않아 나가도 함께 어울릴 수도 없다. 옆에서 구경이나 해야 하는 데 그럴바에야 집에서 혼자 책을 읽는 편이 낫다.
얼마전에 사랑방을 개소했는데 전국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이 참석은 하지 못해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목포에 사는 한 친구는 도연명의 '사시'를 유명한 서예가 한테서 글을 받아 그것을 목판에 새긴 편액을 차를 타고 가져와 벽에 걸어 놓았다. 예전에도 풍류를 아는 사람은 집안에 그림이나 글씨가 든 액자를 옆에 놓고 즐겼다.
추사가 제자 이상직에게 준 세한도도 그런 부류의 작품이 아니겠나 싶다.
어제 목포에 사는 친구가 기증한 편액 사진을 살펴보니 글씨도 괜찮고 편액 모양도 좋게 보였다.
도연명이 사시를 나무 판자에 새겼는데 조각칼로 글자를 한 자 한 자 파려면 상당한 공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도연명은 중국의 옛날 동진 사람으로 난세에도 인품이 훌륭하여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문학작품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전해오고 있다.
농촌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쓴 '귀거래사'는 유명하다. 그가 지은 '사시'는 다음과 같다.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峯)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봄물은 사방의 호수를 채우고,여름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를 만들고,가을달은 높이떠 밝게 비추는데
겨울 고개에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구나)
편액 사진을 보니 셋째연의 밝을 명자가 날일 변이 아닌 눈목자 변이었다.
옥편을 찾아보니 눈목자변도 밝을 명자와 같은 뜻으로도 쓰지만, 본래의 뜻은'볼명', '밝게 보다'로 돼 있어
원문은 어떻게 돼 있는지 서가에 있는 도연명 시집을 찾았다. 그런데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책이 어디로 숨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방은 좁고 책이 많아 서가를 이중,삼중으로겹쳐 세워 놓았더니 어느 구석에 처박혔는지 알 수가 없다. 굴원은 보이는데,이백과 도연명이 암 보인다.
분명 어딘가에 있긴 있을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