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양말 정도의 취미생활

by pahadi


내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는 재봉틀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었다.


옷을 좋아하는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옷을 사 입는 것보다 만들어 입으면 돈이 훨씬 적게 들잖아. 그럼 정해진 돈에서 더 많은 옷을 입을 수 있어. 직접 만들어 입으면 내 취향껏,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고. 이것저것 만드는 것도 좋아하니까 적성에도 맞겠지. 자본 독립 전에 옷 독립! 더 멋지게는 취향 독립?


생각 없이 손만 빠른 나는 바로 재봉틀을 주문했다. 당시 쓸만한 것들 중에 가장 저렴한 모델이었던 첫 재봉틀은 택배박스 안에 한참 머물다 또 한동안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재봉틀은 독학으로 배울 계획이었다. 재봉틀 사는 돈은 안 아까운데 공방에 배우러 가는 돈은 왜 그리 아까운지. 내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무엇이든 혼자 꾸역꾸역 해보려는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빠르고 정확할 텐데!


그렇게 해가 바뀔락 말락 하던 심심한 주말, 재봉틀을 콘센트에 꽂았다. 책과 동영상을 보며 재봉틀을 돌렸다. 자꾸 말리는 원단과 끊임없이 엉키는 실뭉치는 보며 이 재봉틀을 불량품이다!라고 확신하기 직전 겨우 직선 박기 하나를 완성했다. 직선 박기 성공으로 꿈에 한걸음 다가간 나는 원단과 옷 패턴을 사들였다. 그때부터 엉망진창 옷 만들기가 시작됐다.


삐뚤빼뚤한 박음질은 기본. 어쩐지 목둘레가 바짝 쪼이는 블라우스나 팔이 잘 올라가지 않는 원피스. 허리선은 과하게 위쪽에 있거나 지나치게 아래 있거나. 핸드메이드가 아니면 선택할 수 없는 과한 꽃무늬 패턴의 패딩조끼 역시 역작이었지. 엄마는 이런 옷들을 입고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한사코 나를 말리셨다. 엄마 걱정 마세요. 저도 입고 나갈 생각이 전혀 없답니다.


좀 더 좋은 재봉틀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연장을 탓하며 고오오-급 재봉틀에 오버로크 재봉틀까지 들였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을 바꾸는 게 더 빨랐겠지.


몇 달의 공방 생활(결국 배우러 다니기도 했답니다.)과 성능 좋은 재봉틀, 그리고 환경에 미안하게 버려진 엄청난 원단들과 20퍼센트 모자란 옷들. 그리고 아까운 내 시간들. 그 모든 것을 지나 드디어 깨달았다. 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옷을 사 입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그걸 이제야 아는 거야?)


한결같이 성급한 나는 설명서보다 직감을 믿었고 정확성보다 스피드를 사랑했다. 리고 이런 사람은 재봉틀과 잘 맞지 않는다고 5년간의 자체 연구를 통해 결론지었다. 그렇다고 내가 재봉틀과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 재봉틀을 꺼냈다. 시끄러운 의자에게 양말을 만들어줄 참이다. 드르륵드르륵 쭉쭉 나가는 박음질을 보니 신이 난다. 수리 2를 보다 초등 수학 문제집을 푸는 기분이랄까. 우린 딱 이 정도의 사이인 거야. 의자 양말 정도의 사이. 이 사실을 아는 데까지 5년이 걸렸다. 하지만 전혀 아쉽지 않다. 딱 좋은 시간, 딱 좋은 사이다.


핵심 요약: 옷은 그냥 사 입읍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New things get 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