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원피스는 대학교 2학년 때 구입한 무릎 정도 길이의 하얀색 원피스였다. 물론, 어릴 적에도 원피스를 입었겠지만 내가 직접 원피스를 산 건 그게 처음이었다.
교복과 체육복으로 고등학교 3년을 보내고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어른들이 대학에 가기만 하면 살도 빠지고 예뻐진다고 했는데 순전히 뻥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었던 건 단순히 그냥 믿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도 누군가 40이 넘으면 살이 빠지고 예뻐진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순진한 척 확 믿어버릴 텐데)
넉넉한 바지와 티셔츠, 긴 겉옷으로 통통한 몸을 가리기 바빴던 나는 무슨 바람인지 어디선가 읽었던 "여자는 원피스를 입는 여자와, 원피스를 입지 않는 여자로 나뉜다"라는 말도 안 되는 문장에 끌려 원피스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하도 오래전이라 출처도, 정확한 문장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시골뜨기 오브 더 시골뜨기였던 나는 어디서 원피스를 사야 하는지도 몰랐다. 정확히는 어디에 가야 예쁜 원피스를 살 수 있는지 몰랐다. 더 정확히는 예쁜 원피스가 뭔지도 몰랐다.
친구의 도움으로 찾아간 곳은 한 아웃렛이었다. 강남이었던가, 목동이었던가. 친구는 이곳에서는 브랜드 옷을 싸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세상에 그런 곳이 있다고? 귀가솔깃해지는 이야기였다.
친구 말대로 매장 앞 가판대에 누워있는 옷들은 내 작고 귀여운 지갑으로도 살 수 있었다. 이곳에서 예뻐 보이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담아 나의 첫 원피스를 샀다.
무릎까지 오는 단정한 길이의 하얀 원피스는 한 마디로 청순함 그 자체였다. 반팔 소매에는 다소곳한 뽕, 그 위에 화룡점정 앙증맞은 리본까지 달려있었다. 이거다! 가격도 39000원. 이 정도는 지불할 수 있겠다. 문제는 사이즈였다. 가판대에 누워있던 요 녀석은 55 사이즈뿐이었다. 내 몸뚱이를 집어넣기에는 꽤? 다소? 조금? 작았다.
하지만 나는 곧 살을 뺄 것이고, 이 가격에 이렇게 귀여운 원피스는 다시 살 수 없을 것이며, 멋쟁이가 되기 위해 반드시 원피스를 사야 했기 때문에 나는 고민하지 않고 시원하게 말했다. "이거 주세요."
기숙사로 돌아와 하얗고 귀엽고 청순한 원피스에 우격다짐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숨까지 한껏 몰아내고 나니 지퍼가 잠기긴 잠겼다. 거울 속에 내 모습을 흐린 눈으로외면하며 상상 속의 내 모습에 흠뻑 빠졌다. 청순한 원피스를 입은 더없이 청순한 나.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어두운 피부에 그 형광 같은 하얀 원피스가 어울렸을 리 없다.)
그렇게 나는 원피스를 입는 여자가 되었다. 아니, 원피스를 가진 여자가 되었다. 당연히 나는 살을 빼지 못했고, 나의 첫 원피스는 그 해 여름을 깜깜하고 좁은 기숙사 장롱 속에서 보냈다. 그다음 해도 마찬가지고 그다음 해도 역시나... (다이어트는 기초대사량이 훅 떨어진 지금도, 혈기 왕성했던 그때도 힘든 것이다.)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흘러 강산이 한 번쯤 바뀌었을 때 청순함도 어느새 촌스러움이 되어버렸다. 결국 옷장 신세를 면치 못하던 하얀 원피스를 헌 옷 수거함으로 긴긴 여행을 떠났다. 금방 새로운 주인을 만났을지, 외국까지 여행을 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입어본 적 없는 그 첫 원피스를 시작으로 나는 원피스 덕후가 되었다. 옷장을 가득 채운 옷들의 80퍼센트는 원피스. 10퍼센트 중 100퍼센트는 원피스 잠옷이다. 꽃무늬와 도트 무늬로 도배된 내 옷장은 그게 그거인 것 같은 옷들의 집합소지만 저마다 사연을 가진 나의 보물상자다.
시원하고 간편하고 원피스만 한 옷이 없다.나에게 원피스는 더 이상 멋내기 용이 아닌 실용주의 생활복이다. 복잡한 인생에 위, 아래 옷까지 맞춰 입느라 머리 아플 필요 없으니까. 오늘도 원피스 하나 훌러덩 걸치고 가볍게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