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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hadi Jun 24. 2022

기운팍팍 응급처방


주말 내내 휴대전화를 붙들고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거렸다. 여기서라도 존재의 이유를 찾아보려 꾸역꾸역 물건들을 사제꼈다. 뭘 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월요일부터 차곡차곡 쌓여갈 택배박스를 보면 더 우울해질테지만 지금은 이러지않고는 견디지 못하겠다. 더 이상 가산을 탕진하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아슬아슬 견디다가 무너지는건 한 순간이다. 이건 내가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인생이 이런거다. 이럴 때면 커피를 마신다. 쓰디 쓴 인생에 쌉싸름한 커피맛을 더하면 조금 숨통이 트인다. 이럴 때마다 커피를 마시다간 밤을 꼴딱 새우기 딱 좋다. 역시나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이미 기운이 꺽인 다음에는 고작해야 쇼핑이나 커피 밖에 생각이 안난다. 우리는 언제나 수렁에 빠졌었고 수렁에 빠졌고 수렁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위기상황에 나를 도와줄 탄탄한 동아줄을 미리 잘 준비해둬야한다. 일종의 기운팍팍 응급처방 리스트랄까.


잘 생각해보면 쇼핑이나 커피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 책 읽기도 그  중 하나다. 숨쉬는 것조차 버거울 땐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고르는 일도 벅차다.(이 기분좋은 일조차!) 그럴 때를 대비해 미리미리 좋아하는 책들을 내 방 책장에 준비해둬야 한다. 김영하 작가도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라는 멋진 말씀을 남기시지 않았나.(이렇게 생각하니 몇년 째 펴보지도 못한 책들에게 조금은 덜 미안해진다.) 좋아하는 책을 모으는 것과 더불어 좋아하는 문장들도 차곡차곡 모아둔다. 노트에 꾹꾹 눌러쓴 문장들은 약국에 요란한 광고가 붙은 자양강장제처럼 즉각 효과를 나타낸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도 기분전환에 참 좋다. 어릴적 부터 손바느질로 인형을 만들기를 즐겨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인형을 만들었다. 단순 반복되는 일에 집중하다보면 나를 슬프게 하는 일들이 가물가물해지곤 했다. 하지만 방안 한켠에 자리잡은 인형들이 저마다 슬픈 사연을 떠올리게해 그만두었다. 그 대신 재봉틀을 배웠다. 드르륵 드르륵. 신나게 재봉틀을 밟다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내가 고른 옷감으로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일은 모래알처럼 허무한 하루에 엄청난 성취감을 준다. 마음대로 되는 일 하나없는 인생에 이런일 하나쯤은 있어야지. ( 물론 늘 내 마음대로 작품이 완성되는 건 아니지만ㅎㅎ)


나이가 들수록 내 삶의 범위가 좁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새로운 곳에 가는 것도,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도 그 전보다 더 신경써야할 수 있다. 여러 이유가 있을텐데 체력적인 부분도 크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기운이 넘칠 때 미리미리 배워두는 것이 현명하다. 일하랴, 아이들 키우랴 지금은 정신없지만 나중을 위해 악기와 운동을 배워두고 싶다. 미처 배우지 못하고 중고로 판 우쿨렐레를 배워서 좋아서 하는 밴드의 "길을 잃기 위해서"도 연주하고 싶고, 수영도 배워 여름 휴가 때 물놀이도 즐기고 싶다. 이렇게 인생 키트를 잘 만들어 두어야지. 일종의 노후준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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