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 오랜만에 서울

by pahadi

불안한 시국이지만 건강검진 때문에 오랜만에 서울에 왔다. 내게 서울이란 종로를 의미한다. 얼기설기 얽힌 길 아래로 수많은 역사가 살아있는 곳. 나는 이 복잡하고 오묘한 곳이 참 좋다. 시청 주변 붉은색 벽돌들을 보니 진짜 서울에 온 실감이 난다. 언젠가 꼭 종로에 살아보고 싶다.


이른 아침인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걸음을 재촉한다. 대부분 출근 중인 것 같다. 매일 지하철 타고 다닐 때는 당연했던 풍경들이 모두 신선하게 다가온다.


조금이라도 짬을 내 공부하려고 엄청나게 두꺼운 자격증 책을 꺼내보는 아저씨. 대체 무얼 공부하시나 궁금해 책 덮을 때 슬쩍 표지를 보려는데 살뜰하게 달력 종종이로 표지를 싸 두셨다. 끝내 무얼 그리 열심히 공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반짝이던 아저씨의 눈빛에 합격을 응원해 본다.


시청역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가려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앞에 할머니 한분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자꾸 유지하게 된다. 자세히 보니 깅엄 체크 H라인 스커트에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으신 모습이 참 세련되셨다. 가볍게 드신 검정 가방도 어찌나 멋스러우신지! 아마도 꼿꼿하게 바른 자세가 한 몫하는 것 같다. 나도 얼른 허리를 세운다.


드디어 병원에 도착! 2년마다 돌아오는 이 순간이 너무 싫다. 시험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성적이 나오는 날이랄까. 2년 동안의 생활을 급하게 반성해본다. 정말 이번만 무사히 넘어가면 밥도 골고루 잘 먹고 커피도 줄이고 운동도 할게요. 제발요. 매번 살기 싫다 생각하지만 참 오래오래 살고 싶은 모양이다. 제가 아직 할 일이 많거든요. 아이도 길러야 하고 부모님도 봉양해야 하고 작가로 성공도 해 보고 싶고요. 아직 못 먹어본 것, 못 가본 곳도 많다고요.


앞으로 2년 동안 이 간절한 반성의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이제 정말 잘! 잘- 살게요. 너무 간절한 나머지 서울이 싫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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