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일

by pahadi

내가 준이를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준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보라색, 안킬로사우르스, 애착 인형 토끼, 사촌 누나 또또, 페파 피그, 포도와 바나나, 물고기.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이 쉬운 질문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리게 된다. 이걸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이게 그다지 좋지 않은데?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좋아하지 않음이 0에 수렴하면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걸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근사해 보일까? 이상해 보일까?


좋아하는 것 하나를 말하는데도 내 세계를 좁게 만드는 이상한 의문들이 따라온다. 그냥 이게 좋아라고 말하면 끝인데 말이다. 나이가 먹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르겠다.


이걸 좋아한다고 하면 왠지 괜찮은 사람일 것 같고(근데 그다지 좋지 않고) 이걸 좋아한다고 하면 왠지 이상한 사람일 것 같고. 내가 원하는 건 이걸 좋아하는 나인데 이건 도무지 끌리지가 않는다. 아직도 상과 현실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지. 억지로 펜을 들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써 내려간다. 여행, 커피, 책, 그림, 장난감.... 그러다 펜을 내려놓는다.


여행은 안 간지 한참인데 좋아했었던가. 위염 때문에 커피도 이제 슬슬 줄여야지. 책은 뭐 많이 읽지도 않는데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나이에 장난감이라니.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아마도 쉬운 인생이 어려워진 건 내 탓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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