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 돌아갈 수 없는 길

by pahadi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수박이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이제 가장 좋다고 말하기엔 다소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여름이 오면 우리 엄마는 늘 수박을 먹기 좋게 깍둑 썰어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먹고 싶은 때마다 꺼내 맛있게 먹는 일뿐.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냉장고 속 수박이 고이 준비되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이 내 일이 되었다. 시장에 가서 통통통 잘 익은 수박을 고르는 일, 커다란 수박 이고 지고 집까지 오는 일, 수박을 깨끗이 씻는 일, 수박껍질을 잘라먹기 좋게 썰어두는 일, 수박껍질을 버리는 일, 혹 수박이 냉장고에서 상했다면 비릿한 냄새를 참아가며 버리는 일. 맛있는 수박을 고르는 건 왜 이리 어려운지. 까만 줄이 선명하고 꼭지가 싱싱하고 두들길 때 소리가 명쾌한 것이 맛있다는 이론은 빠삭하지만 실전은 사뭇 다르다. 그렇게 복불복의 산을 넘어도 또 두꺼운 수박 껍질이 장벽이다. 자르기도 힘들고 버리기는 더 힘들다. 그렇게 수박과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에서 점점 귀찮고 골치 아픈 수박이 되었는데 김훈 작가가 수박에 대해 묘사한 글을 읽으며 다시 수박에 대한 애정이 솟구쳤다.


수박은 천지개벽을 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쪽으로 갈라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영롱한 씨앗들이 새까맣게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 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나에게 수박은 더 이상하고 달콤하고 시원하기만 한 과일이 아니다. 그저 귀찮고 골치 아픈 과일도 아니다. 한 번의 칼질로 천지개벽하며 세계를 전환시키는 감동을 주는 과일이다. 전에 내가 알던 수박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


비슷한 경험은 또 있다. <나의 문어 선생님>은 한 인간과 문어의 교감과 우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야생 문어와 우정을 나눌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런 다큐먼터리일거라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크레이그 포스터에게 어느 날 번아웃이 찾아왔고 무작정 어릴 적 뛰놀던 고향 남아공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프리다이빙을 즐기며 자신을 추슬러갔다. 그리고 바닷속에서 한 문어를 만났다. 그는 문어에게서 어떤 특별함을 느꼈다. 그 무언가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매일 문어를 만나러 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문어가 한 인간에게 호기심과 친근함을 느끼며 악수를 청하는 장면은(지극히 인간의 시점으로 볼 때) 정말 뭉클했다. 문어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 역경은 문어를 똑똑하게 해 주었다. 살아남기 위해 문어는 매 순간 기지를 발휘한다. 조개껍데기를 주워 위장하고, 천적 상어를 피하기 위해 상어 등에 올라타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문어에게도 시련은 찾아온다. 상어의 공격에 문어는 다리 하나를 잃는다. 크레이그 포스터는 상어에게 물어뜯기는 문어를 도와주고 싶지만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어는 며칠 동안 사냥도 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며 결국 상처를 이겨낸다. 일상으로 돌아온 문어가 물고기들과 장난치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대단하고 기특하다. 아마도 나는 다시는 문어숙회를 맛있게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을 읽고 간장게장이 금기가 된 것처럼.


오랜만에 서울에 갔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주의가 환해졌다. 한강을 지나고 있었다. 유병욱 작가의 <없던 오늘>에 쓰인 한강이 떠올랐다.


나는 특히 몇 개의 지하철 구간이 한강을 지날 때,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며 밖이 보이는 장면을 좋아하는데, 마치 누군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덮개를 닫아 보관하다가 짜잔 열어 보이는 것만 같다. 그 순간 한강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 그 계절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다. - 유병욱 <없던 오늘> 중 -


처음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보던 날이 떠오른다. 시골뜨기인 나는 대학생이 되어 처음 지하철 타는 법을 배웠다. 당연히 지하로만 다니는 줄 알았던 지하철이 갑자기 환해지고 한강이 보였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빌딩 숲 사이에서 한결같이 제 길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은 낯선 타지 생활을 지쳐가는 나에게 큰 위로였다. 물론 갑자기 쏟아지는 햇빛도 이 드라마틱한 장면에 큰 몫을 했을 거다. 막연하게만 느꼈던 감동을 누군가가 정확히 묘사해주니 감동은 배가 되었다. 목적지보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게 될 한강이 더 기대됐다. 돌아오는 길에 한강은 노을 속에 더 아름다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노을 속 한강을 모르던 나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림일기 - 정성을 들인 일은 분명 반짝반짝 윤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