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통 화장을 하지 않고 다닌다. 꾸밈 노동을 하지 않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춘기 시절에도 없던 여드름이 20대 후반에 찾아왔다. 성인 여드름이 얼굴을 뒤덮었다. 피부과에 다녀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압출하고 약을 먹어도 잠시 뿐이었다. 내가 온갖 수를 쓸 때마다 여드름은 더 촘촘히 내 얼굴을 뒤덮었다.
울긋불긋해진 피부는 따가웠고 내 마음도 따갑게 했다. 피부로 인한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온갖 여드름 화장품을 사들이고 피부과를 들락거리며 방법을 찾던 나는 한 권의 책을 읽게 됐다. 피부에 어떤 자극도 가하지 말고 피부의 재생능력을 되살려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과도한 세안과 스킨케어가 문제이니 모든 것을 멈춰야 한다고. 진짜 아무것도 하지 말아 볼까?
그래서 아침과 저녁 물 세안만 하고 모든 화장품을 끊었다. 보습제를 바르지 않으니 얼굴은 거칠어지고 하얀 각질들이 눈에 띄게 생겨났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회사에 가는 건 진짜 아니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게 웬걸. 이거 너무 편한 거 아닌가. 아침에 세안 후 기초 화장품을 바르고 화장을 하는 과정이 사라졌다. 지친 몸으로 퇴근을 하면 나를 가장 괴롭혔던 클렌징과 목욕이 아주 간단해졌다.
어차피 피부가 난리 난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어떤가. 지금보다 나빠질 수는 없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게으른 나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더 이상 새로운 여드름 화장품을 사지 않아도 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압출하러 피부과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 나의 아침과 저녁이 매우 편해졌다. 곧 그만둬야지 그만둬야지 하던 게 어느새 3개월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났다.
시간이 흐르니 피부는 알아서 살 길을 찾아갔다. 클렌징으로 과도하게 유수분을 제거하지 않으니 보습제를 쓰지 않아도 피부가 건조하지 않았다. 어느새 각질과 여드름이 사라졌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세안 후 보습제 하나만 바른다.(나이가 드니 피부가 건성으로 바뀌어 보습제는 바르기로 했다.) 여기서 핵심은 지나친 클렌징을 삼가는 것인데 화장을 하게 되면 클렌징을 안 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장도 하지 않는다.(이건 다 핑계고 그냥 귀찮...)
그렇다고 내 맨얼굴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맨 얼굴로 다니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가끔은 맨 얼굴의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또 피부가 뒤집어질까 하는 걱정과 귀찮음으로 이겨내고는 있지만 내 맨얼굴에 당당하지는 못한다. 립스틱이라도 발라볼까.
그러다 미국의 가수 알리샤 키스가 노 메이크업을 선언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녀는 이제 메이크업을 하지 않겠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나 많은 제약을 가하며 살아간다. 남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많은 제약을 가한다. 솔직히 난 그런 제약에 너무 질렸다. 이제 그걸 넘어서려 한다." 우와! 너무 멋지다. 기사에는 그녀의 메이크업 사진과 노메이크업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 메이크업 사진이 더 예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맨 얼굴로 당당히 웃고 있는 그녀가 더 멋졌다. 내가 맨 얼굴로 다닐 멋진 이유 하나가 추가됐다.
메이크업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내가 맨 얼굴로 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편해서다. 화장을 하고 지우는 과정이 내게는 엄청난 노동처럼 느껴진다. 어차피 계속 맨얼굴로 다닐 거라면 내 맨얼굴도 좀 사랑해줘야겠다. 화장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웃는 얼굴은 다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