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할 필요 없단다

by pahadi

주말마다 아이를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번 주에는 1박 2일로 바다에 간다. 첫째 날엔 조개잡기와 모래놀이를 하고 둘째 날엔 아이가 좋아하는 공룡박물관에 갈 것이다.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아이를 위해 보낸다.


분명 연애시절 남편과 왔던 바닷가인데 풍경이 사뭇 다르다. 철썩이던 파도가 우리의 감성을 충만하게 해 주던 그 시절의 바다는 온데간데없다. 우리는 오로지 '게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아이는 아빠, 엄마가 게를 잡아줄 때마다 까르르 웃는다. 웃음소리는 게의 크기가 커질수록 커진다. 아이의 웃음은 부모에게 최고의 강화제 아닌가. 남편과 나는 경쟁하듯 갯벌을 뒤진다.


잡은 게를 다 놓아주고 이제는 모래놀이다. 아이는 모래를 파고 우리는 그 모래로 멋진 성을 만든다. 성모 양 모래놀이 장난감에 물을 적당히 섞은 모래를 넣고 톡톡톡 야무지게 두들긴다. 뒤집어엎으면 그럴싸한 성이 완성된다. 조개를 주어와 성을 꾸미고 물을 길어와 작은 연못도 만든다. 우리 셋의 아름다운 합작품!


숙소로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저녁을 해 먹이고 드디어 첫째 날이 저물어가나 싶었는데 진짜 부모 노릇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아직 쌀쌀한 날씨에 물가에서 무리했는지 아이는 열이 펄펄 났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해열제를 먹여도 열 39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고열로 정신을 못 차리는 아이를 보니 눈물이 찔끔 난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미지근한 손으로 등과 배, 팔, 다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열이 내리길 기도한다. 마음 졸이며 뜬 눈으로 지새운 밤이 꼴딱 꼴딱 지나간다.


어김없이 아침은 오고 아이는 미열로 기운이 없다. 뭐라도 먹일 요량으로 바나나를 살살 긁어 입에 대주지만 영 입맛이 없나 보다. 둘째 날 일정은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준이야, 공룡 박물관은 가지 말고 집으로 갈까?" 기운이 남았는지 아이는 대번에 내 제안을 거절한다. "아니야! 공룡 보러 갈 거야." 공룡 박물관은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잠깐이라도 들렀다 가야지.


공룡 박물관에 도착하자 곳곳에 아이가 좋아하는 공룡이 보인다. 브라키오사우르스, 안킬로사우루스, 트리케라톱스를 본 아이는 좋아서 환호성을 지른다. 설레는 마음에 바빠진 발걸음으로 이곳저곳 잘도 다닌다. 머리를 짚어보니 미열도 내렸다. 좋아하는 것들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박물관이 어찌나 넓은지. 전날 갯벌을 뒤지느라 온 몸에 근육통인데 잠까지 못 잤으니 컨디션이 바닥이다. 아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이만 가자고 말했을 텐데 끙끙 앓던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다. 참은 인을 세 번 새기고 다정한 말들을 쥐어짜며 아이 뒤를 졸졸 쫓는다.


꾹꾹 눌러놓았던 짜증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려는 찰나 다행히 출구가 보인다. 우와 드디어 끝이다!. 나 진짜 잘 참았다!! 이성의 끝을 놓지 않은 나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주차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정말 재밌어. 여기 참 좋아. 나 너무 행복해!"


이 순간 무엇이 더 필요할까. 무지개 빛으로 행복이 번진다. 모든 피로가 사르르 녹는다. 아이를 위해 왔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건 내 만족을 위한 거였다.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까르르 웃음소리를 듣고 싶어 쉬는 날도 마다하고 이곳까지 달려온 건 바로 언제나 '나'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준이야, 넌 절대 효도할 필요 없단다. 너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엄마의 선택이었고 엄마는 너를 키우는 동안 모든 행복을 다 가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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