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이가 금세 잠이 들었다. 아이가 시끄럽게 떠들까 봐 안절부절못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편해지자 비행기 창 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 저녁 느지막이 지는 해가 푸른 하늘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세명씩 앉는 자리인데 아이와 나만 앉게 되었다. 3인용 좌석을 2명이 쓰니 마음까지 널찍해진다. 게다가 비행기 타기 직전 사온 시원한 커피까지! 한 시간 비행이 너무 빨리 지나갈 것 같다. 완벽한 여유를 틈 타 이번 여행의 최고의 순간들을 되새겨본다. 분명 이 순간도 그 한 장면이 될 것이다.
아이와 남편은 바다에 가고 나는 카페에서 쉬기로 했다. (임신 중이라 좋은 점도 있다) 날은 뜨겁고 배는 고팠다. 낯선 곳에서 휴대폰 속 작은 지도로 길을 찾는데 가도 가도 카페가 보이지 않았다. 밭이 이어진 곳에는 도무지 카페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불안이 확신으로 바뀌려는 순간 코너를 도는데 갑자기 뿅 하고 굉장히 이국적인 건물이 나타났다. 내가 찾던 카페였다. 회색 건물 앞에는 고양이 6마리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야자수와 배롱나무가 묘하게 어우러져 모든 게 신기루처럼 보였다.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를 이곳에 데려다준 것 같았다. 카페에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고 미리 생각해 둔 애플 프렌치토스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조합은 역시나 환상이었다. 아- 행복하다. 이게 진짜인가? 꿈은 아닌가.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어디는 비가 쏟아져 물난리가 났는데 이곳은 해만 쏟아졌다. 하루 종일 해변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를 뒤치다꺼리하자니 숨이 턱턱 막힌다. 임신 중이라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니 뜨거운 열기가 머리끝까지 차곡차곡 쌓여 폭발할 지경이다. 발을 담가봐야 잠깐이다.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여름 해변가는 그야말로 불지옥이었다. 바다가 밉고 햇살이 증오스러웠다. 내년에 다시 와 하루 종일 바다에 몸을 담그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여름 해가 길어도 끝내 지고 만다. 해가 지고 뜨거운 여름날도 점점 식어갔다. 시원하다 말할 순 없지만 뜨겁지 않은 바람이 살살 불어온다. 그제야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진한 푸른색에서 하늘색까지 변화무쌍한 푸름을 자랑하는 바다. 철썩철썩 부서지는 파도까지 더해지니 월정리 해변이 와이키키 해변 부럽지 않구나. 바다에 대한 미움 모두 파도에 부서지고 다정한 눈길로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본다. 한낮 증오와 미움이 미안해진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바다는 한결같이 철썩철썩 제 할 일을 하고 그 모습이 너무 믿음직해 마음이 뭉클해진다.
쓰고 보니 참 별거 아닌 순간들이다. 감동이라는 찰나의 감정을 놓쳐버렸다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을 순간들. 소소하더라도 감동하는 순간의 감정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폐 속 깊이 감동의 순간을 들이마신다. 세포 하나하나에 감동을 채운다. 그러자 평범한 것이 특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