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임신성 고혈압 판정을 받았다. 혈압이 130-140을 넘나들자 의사 선생님께서 응급 출산을 권하셨다. 아이를 조금 더 뱃속에서 키우고 싶었지만 혈압이 높으면 아이가 제대로 크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 이르게 출산을 했다. 출산 이후에도 혈압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 내과로 옮겨 진료를 받았다. 다행히 고혈압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상 혈압을 웃돌았다.
아이를 낳고 4년이 지나는 내내 혈압을 잴 때 마다 초긴장이다. 언제나 120을 웃도는 혈압이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아빠, 엄마 모두 고혈압 약을 장기 복용 중이시니 가족력도 무시 못할 일이다. 둘째를 가질 때도 임신성 고혈압이 가장 걱정이었다. 임신성 고혈압에 단백뇨까지 겹쳐지면 임신 중독증이 올 수 있고 임신 중독증의 경우 임신 기간을 다 못 채울 수도 있기 떄문이다.
하지만 인생이 늘 그렇듯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임신성 고혈압 이전에 임신성 당뇨 진단을 받았다. 임당 진단을 받은 날 울면서 산부인과를 나왔다. 임신성 고혈압이 올 확률도 높은데 임당까지 겹치니 세상의 온갖 시련이 나한테 몰려온 것 같았다. 식단조절과 운동을 했는데도 혈당이 잡히지 않으면 어쩌지? 시나리오에도 없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어느새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있었다.
정신 바짝 차리자.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임신성 당뇨', '임당', '당뇨', '임당 식단' 온갖 키워드는 입력하며 정보를 모았다. 혈당체크기를 주문하고 채소-고기-탄수화물 순으로 식사하기, 식후 10분 걷기 등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내가 지킬 수 있는 규칙들을 세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이를 베어문다. 배가 고프면 당연히 맛있는 것부터 먹고 싶어지니까 미리미리 배를 채워둔다. "엄마는 오이를 참 좋아하나봐." 아이가 말했다. "오이를 좋아하지는 않아. 그리고 곧 오이가 싫어질 예정이야"라고 대답하려다가 진짜 오이가 싫어질까봐 입을 닫았다. 간식은 아몬드와 방울 토마토. 난 초식동물은 아니니까 통밀 크래커와 크림치즈, 당뇨용 아이스크림도 준비해두었다.
반쯤은 지키고 반쯤은 못 지키는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마음가짐만큼 언제나 당뇨인이었다. 식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날에는 혈당 체크를 살짝이 건너뛰면 정신 건강에도 신경을 썼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다시 산부인과에 가는 날이 다가왔다. 병원에 가기 전 날이면 시험 성적표를 기다리는 학생의 심정이 된다. 아- 정말 가기 싫다. 이번에는 또 어떤 소리를 듣게 될까.
산부인과에 가면 가장 먼저 접수를 하고 혈압과 체중을 재어 제출한다. 이 두개부터 난관이 예상된다. 혈압은 당연하고 체중도 너무 늘어서 좋을 게 없다. 그런데 어랏! 혈압이 109다. 이게 얼마만에 보는 반가운 숫자인가. 체중도 한달동안 500g 밖에 늘지 않았다. 임당 식단 덕분이다. 고혈압 약 없이는 영영 떨어질 것 같지 않던 혈압이 4년만에 정상 혈압으로 돌아왔다.
단 것을 좋아하는 편도, 과식하는 편도, 짜게 먹는 편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식단에 문제가 있긴 있었나보다. 결국 내 고혈압을 해결해 준 건 임당이었다. 위기는 언제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뒤통수에) 이 정도 설렁설렁 식단이라면 아이를 낳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남은 2개월만 잘 버티면 임당이 내 은인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