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다니는 길에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출발했다. 휴대전화 직사각형 속에 갇혀있던 세상이 3D로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동네였구나. 이렇게 파란 하늘이었구나. 시선을 달리 한 것뿐인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풍경에 어울리게 나도 좀 멋진 사람이 된 것 같다.
어제보다 더 추운 날씨가 예상된다고 한다. 어제도 추웠는데 더 춥다니! 정말 나가고 싶지 않지만 혹독한 추위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이 날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내복을 꺼내 입고 두툼한 울양말을 신는다. 카디건도 하나 더 껴 입고 내 것 중 가장 따뜻한 외투를 걸친다. 부츠를 신고 드디어 출발. 막상 나오니 이 따위 추위도 견딜만하네. 너무 겁을 낸 모양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이다.
숫자는 나를 늘 불행하게 만든다. 내 통장에 찍힌 익숙한 숫자들. 체중계에 새겨진 낯선 숫자들. '좋아요' 옆에 작고 귀여운 숫자들. 너와 나의 차이에 점점 커져가는 숫자들. 알람 속에 숨겨진 가장 싫어하는 숫자들. 인생은 결코 더하기 빼기가 아닌데 왜 난 이 불행한 숫자들 곁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역시 바보다. 그러니까, 나는 바보니까 이제 좀 숫자들은 잊어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