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과 독한 감기로 떠들썩한 날들이 지나고 오랜만에 평화로운 밤이다. 고요한 밤이 낯설어 책을 꺼냈다. 사두고 바빠지는 바람에 아직 읽지 못한 새 책이다. 빳빳한 표지를 넘기는 일은 늘 설렌다. 다시 돌아온 나를 축하하듯 신나게 책장이 넘어간다.
제목은 <파리 스케치>.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쓴 에세이다. 나는 에세이를 가장 즐겨 읽는다. 소소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가 좋아서다. 특히 소설가나 시인이 쓴 에세이는 더 매력적이다. 시나 소설을 읽을 때는 알지 못했던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어 좋다. 감히 만나볼 수 없는 작가들의 생활 속을 들여다보면서 일면식도 없지만 조금 친해진 기분이 든다. 하늘이 내려준 천재 같기만 한 그들도 우리처럼 울고 웃는 걸 보니 모든 것이 사소하게, 모든 것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 <좋은지 나쁘지 누가 아는가>를 통해서다. 시인의 언어로 풀어낸 이야기에는 따스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가난과 문학으로 고통받던 스물두 살 그에게 많은 위안과 힘을 준 책이 바로 헤밍웨이의 에세이였다. 그는 당시 '우울한 도시의 축제'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그 시절을 견뎠다고 했다. 류시화 시인이 행운의 부적이라 소개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봐."
이 선물 같은 구절을 가슴에 품고 그는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욕심부리지 않고 진실한 문장 하나 쓰는 것부터 시작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이 문장에 반해 나도 헤밍웨이의 에세이를 찾았다. 지금은 절판된 '우울한 도시의 축제'를 구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히도 <파리 스케치>라는 이름으로 만날 수 있었다.
나와 <파리 스케치>의 만남을 되새겨보며 운명이란 거대한 흐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젊은 시절 헤밍웨이가 파리를 헤매며 써 내려간 글이 류시화 시인을 통해 나에게로 왔다. 잔잔한 수면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가 수없는 동심원을 그려나가듯 그렇게 퍼지고 퍼져 이 작은 소파에 앉아있는 나에게까지 왔다. 삶은 이렇게 이어지고 이어져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늘 혼자라고 떠들어 댔지만 앞 선 발자국이 길이 되고 어디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따뜻한 숨결이 늘 우리 곁에 있다. 고요한 밤 나를 비추는 별빛 하나마저 그냥 내게 온 것은 없으니 모든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