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과 컵의 경계가 모호하던 어린 시절, 나는 컵을 지성인의 무엇, 문화인의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컵에 물을 쪼르르 따라 마실 때면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것처럼 소박함 우쭐함을 느꼈다. 그렇게 컵은 나에게 특별한 식기이자 수집품이 되었다.
지금 내 옆에는 하얀 도자기에 빨강 동백꽃이 그려진 작은 컵이 있다. 오늘은 이 컵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준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나도 남들 다 간다는 태교여행을 갔다. 4월 제주도는 변심한 애인처럼 갑작스럽게 폭우와 돌풍을 선사했다.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은 거센 바람에 지쳐 ko패를 선언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커다란 야자수조차 뽑힐까 걱정스러웠다. 함덕 해수욕장, 카멜리아 힐, 비자림을 가려던 계획은 전면 취소되고 숙소 안에서 흔들리는 창문만 바라봤다.
아, 정말 어떻게 얻은 휴가인데. 아기가 태어나면 한동안 이런 여행은 꿈도 못 꿀 텐데. 억울함은 분노로 이어지고 분노는 태교에 안 좋으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실내로 여행을 다니자. 근데 어딜가지? 나는 인터넷을 뒤지며 제주도 소품샵 투어를 계획했다. 차 타고 다니면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태교 여행은 어느덧 소품샵 투어와 쇼핑이 되었다. 작은 규모의 소품샵들은 각각 개성이 뚜렷해 현대 미술관처럼 보는 재미가 좋았다. 게다가 여차하면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이 제가 미술관보다 소품샵을 더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귀여운 걸 워낙 좋아하는 나에게는 전화위복 여행이었다.
나의 쇼핑 1순위는 역시 컵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컵을 만났다. 직접 만든 도자기를 판매하는 가게였는데 이 컵은 B급으로 분류되어 진열장 밑 상자에 도자기 무덤에 묻혀있었다. <B급 상품. 5000원>이라는 문구가 그들의 존재를 설명했다. 나는 언제나 B급에 끌렸다. 내가 B급 인간이라 그런가.
좋아하는 동백꽃이 그려져 있으니 당연히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가격도 5000원! 하얀 도자기에 살짝 남겨진 흠집은 문제 되지 않았다. (흠집 없는 것이 어딨어?) 그렇게 B급 동백꽃 컵 2개가 비행기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왔다.
지금 이 컵은 홈카페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뜨거운 라테와 차가운 아메리카노 외에는 커피로 치지 않던 나였지만 신생아를 키우는 초보 엄마에게는 이것조차 사치였다. 뜨거운 라테는 위험해서 안 되고 출산 후에 약해진 이 때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와도 굿바이 했다. 그래서 홈카페에 등장한 새로운 메뉴가 '미라'다. 미지근한 라테의 줄임말로 캡슐커피 하나로 내린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냉장고에 갓 꺼낸 차가운 우유를 부어 이도저도 아니게 마시는 커피다.
이래 봬도 꽤 예민한 이맛의 소유자인지라 맛도 참 중요한데 이 컵이 그 비율을 기가 막히게 잡아준다. 도자기라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바로 내리기에도 안성맞춤이고. 하얀 도자기에 쪼르르 뜨거운 에스프레소가 담기면 망설임 없이 컵에 9/10까지 찰랑찰랑 우유를 붓는다. 나와 남편 것으로 산 2개의 컵은 오전에 한 컵, 오후에 한 컵이 되어 나의 지친 육아 라이프를 달래준다.
오늘도 이 컵이 만들어준 완벽한 미라를 마시며 생각한다. 하늘이시여. 그 폭풍우부터 오늘까지 당신은 다 계획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