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갔다. OTP카드가 만료되어 재발급을 받으려고 한다. 스마트폰을 꺼내 은행 어플에 접속한다. 가까운 지점을 찾아서 어플로 번호표를 받았다. 대기 인원 14명. 내가 도착할 때쯤이면 대기 인원 한 자릿수에는 들 것이다. 스마트폰을 좀 스마트하게 쓴 기분. 세상 참 편해졌다.
은행에 도착했다. 지극히 인간적인 안내원이 방문 이유를 묻는다. "OTP 카드 재발급받으려고요." 어플로 번호표를 받았다는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안내원이 말한다. "OTP카드 재발급은 바깥쪽 디지털 셀프 존에서도 가능합니다. 디지털 셀프 존을 이용하시겠어요? 기다리시겠어요?"
..."네?"
안내원을 따라 나란히 선 ATM 옆에 커다란 기계로 갔다. 기계에는 DIGITAL SELF ZONE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물과 반찬은 셀프! 는 알아도 은행에서는 어떤 셀프가 있나.
"바이오 인증 등록하셨나요?" 은행원이 물었다. "네?..."
"정맥 등록하시는 건데 안 하셨으면 신분증을 여기에 넣어주세요."
내가 너무 오랫동안 은행에 오지 않았나. 정맥 등록이라니. 나름 시대에 흐름을 잘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10년은 뒤처진 기분이다. 당황스러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신분증을 기계에 넣었다.
"기다리시면 화상전화가 올 거예요. 전 가보겠습니다." 디지털 셀프 존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와 기계만 남았다. 이게 무엇이 쓰는 것인고. 기계를 살펴볼 새도 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은행원의 얼굴이 뜨고 나도 신분 확인 차 마스크를 벗었다.
"일단 기존 인터넷뱅킹을 해제하셔야 하는데 이쪽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로 인증번호가 오시면 여기에 입력을 하시고... 네 그다음 동의함에 체크하시고... 수수료가 나갈 계좌번호 선택하시고... 이제 다시 OTP 등록하시려면 다시 인증번호를 입력하시고...."
속사포 같은 진행과정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클릭 클릭 클릭. 인증번호를 확인하고 입력 입력 입력. 물론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는 과정이었지만 누구나 새로운 것은 어려운 법. '우리 엄마가 이 기계를 이용하시면 잘하실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물론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서 면대면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지만 선택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니까. 그리고 이어서 미래의 내가 걱정됐다.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도 이것들을 잘 이용할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새로운, 더 혁신적인 것들이 쏟아질 텐데. 그리고 그것들 지금보다 더 편리하겠지만 인간적이지는 않겠지. 식당 키오스크에 적응한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까. 기계가 뱉어낸 OTP카드를 들고 돌아서는 발걸음 무겁다.
은행을 나와 바로 앞 야채 가게에 갔다. 야채를 고르고 줄을 서는데 앞에 선 할머니께서 천천히 거스름 돈을 세신다. 주인은 야박하게 소리를 치며 말했다. "아, 맞게 드렸다고요. 얼른 가세요." 갑자기 분노가 치민다. 아니, 못 받을 돈 받으셨나. 내가 받을 돈 맞나 세어보겠다는데 왜 저런담. 이 분노를 가득 담아서 소심하게 말했다. "저 계산 천천히 해도 돼요. 천천히 세어보세요." 그리고 더 큰 분노를 담아서 속으로 속삭였다. '내가 여기 야채 가게는 다시는 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