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앵콜요청금지 Apr 07. 2016

나라타주

시마모토 리오

어떤 기억은 빛이 바랄수록 선명해진다

나라타주(narratage): 나래이션(narration)과 몽타주(montage)의 합성어. 나레이션에 맞추어 화면의 시점과 장소를 자유롭게 전환해 줄거리를 구성하는 기법으로, 주로 옛일을 회상하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사용된다.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연극부 선생님을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나 졸업생으로 동아리 연극을 도우면서 사랑을 이어가는 사연있는 주인공의 가슴 아픈 정통 로맨스 소설이다. 차분하고 힘있는 문체가, 정말 잘 쓴 로맨스라고 생각하는 이시다 이라의 "잠들지 않는 진주"를 연상시켜서 인상적이었다.


시마모토 리오 라는 이 작가는 83년 생밖에 안됐는데, 17세에 한 신인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등 각종 굵직한 상들의 후보로 오르면서 기대를 받고 있는 젊은 작가인 듯 하다. 다른 책들도 읽어볼 의향이 생겼다.


학창시절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었던 선생님을 다시 만나는 거나, 사실은 쉽게 사랑을 맺을 수 없는 이러저러한 사연이 있다는 설정, 그 와중에 다가오는 또 다른 사랑까지. 설정과 결말의 전형성은 아쉬운 부분. 그래서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기도.


"구도는 자신이 어중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 책임감도 강하고, 완벽주의자야. 성격이 그런 사람은 끝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끙끙 앓는 게 문제야. 죽고 싶을 정도로 싫은 일은 그냥 내던져버려도 괜찮아. 너보다 마음고생이 심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너도 참고 힘내라. 그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지. 개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상대화된 행복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누구든 사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자신이 지향하는 명확한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면 괴로워하거나 노력하지 않는 법이잖아. 네가 정말 어떤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 난 그걸 도피라고는 생각지 않아."
- p.79

죽고 싶을 정도로 싫은 일은 그냥 내던져버리라는 말. 이것도 사실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어쨌든 죽을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게 괴로운 일은 버리려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는 편인데. 실천 자체는 매번 쉽지가 않다.


"하지만 역시 전, 하야마 선생님, 다른 사람이 아닌 선생님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곤경에 처해 있다면 그게 언제가 되었든 저도 선생님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고서 그를 돌아보았더니, 하야마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중략)
"내가 너를 도운 것이 아니라, 어쩌다 내가 한 말과 그 말을 받아들인 네 파장이 맞았을 뿐이야. 똑같은 말을 했는데도 전혀 효과가 없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으니까. 게다가 나라고 모든 학생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아는 건 아니야. 아니지, 어쩌면 거의 모른다고 해야겠군. 그건 나이 차 때문만은 아니라, 어른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야. 상대방이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오히려 드물 정도지."
- p.119

주인공의 이야기도 그렇고 친구, 가족, 사제 간의 파장이 맞거나 맞지 않는 관계의 묘사가 여러 번 나온다. 정말 파장 같은 게 있나 싶으면서도 그렇지 않으면 설명하기 힘들어지는 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 사이의 일.


실은 그때 혼자였어도, 실제로는 뛰어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도중에 겁이  나서 뒤로 물러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치 현실 같은 실감은 있었다. 필사적인 심정으로 죽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묘한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오히려 쉽게 죽었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p. 205

파란 하늘 가까운 벤치에서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구름 없는 하늘이 눈부시게 청명했다. 멀리 사라지는 비행기도 있었는데 쪼끄매서 잘 안 보임 ㅋ


후반으로 갈수록 가슴이 시리며 울컥해졌다. 과하게 감정이입했음-ㅁ- 대작 정도는 아니지만 차근차근 성실하게 나래이션되는 꽤 괜찮은 연애소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