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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콜요청금지 Sep 18. 2016

피로사회

한병철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이 책을 읽었다.


2012년쯤 국내 출판 직후에 읽었던 책이었는데, 며칠 전 갑자기 떠올라서 책장에서 꺼내봤다. 저자는 한국사람이지만 독일에서 철학과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고 독일의 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로, 저자가 독일어로 펴낸 책을 한국에서 번역해서 출판한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로서 그의 책은 독일에서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책의 제목인 '피로사회'라는 용어는 상용어가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로 명명하고, 그로 인한 현대인들의 우울증을 설명하는 이 책은 114 페이지밖에 안 되는 작고 얇은 책이지만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어렵게 느껴졌던 내용을 정리해볼 겸 나름대로 소화한 책의 내용을 요약해서 남겨본다.




1장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병리학적인 고유의 질병이 있다고 한다면, 1-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냉전의 20세기는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이 뚜렷이 구분되어 낯선 것은 배척하고 부정하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자아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자아를 부정하는 타자가 침투했을 때 타자의 그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아를 확인해내는 것이 면역 반응이다. 즉 나와 다른 남을 부정함으로써 나를 지켜낸다. 20세기에는 부정성의 과잉을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다스렸다면, 다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21세기의 세계화는 긍정성이 과잉되어 있으며 이는 동일한 면역화로는 방어할 수가 없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 우울증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p.21-22


2장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21세기는 또한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는데, 성과사회의 주민은 더 이상 '복종적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가 되고, 규율사회의 대표적인 조동사는 '~해서는 안된다'였지만 성과사회의 대표적인 조동사는 '~해야 한다'가 된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p.27-28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 성과사회에서는 지배기구가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주체는 자유롭지 않고,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가 된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p.29


3장 깊은 심심함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하며 이는 지각이 파편화되고 분산되는 주의 구조로의 변화를 야기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으로부터 창조되어 왔는데 산만한 주의 구조를 갖는 현대사회에서는 조금의 심심함도 참지 못한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배경의 사태도 계속 정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멀티태스킹뿐만 아니라 컴퓨터 게임과 같은 활동 역시 야생동물의 경계 태세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주의 구조, 넓지만 평면적인 주의 구조를 생산한다. p.31


4장 활동적 삶

20세기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을 언급하며 행동의 영웅성을 찬양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5장 보는 법의 교육

아이러니하게도, 활동 과잉이 될수록 오래 천천히 사색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수동적이 된다. 그리고 가속화와 활동 과잉의 홍수는 잠시 멈춰서 현재를 돌아보고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분노의 여지를 주지 않고, 긍정화된 세계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 기계가 된다.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p.52-53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 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써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p.54-55


6장 바틀비의 경우

1853년에 발표된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의 등장인물인 필사원 바틀비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규율사회의 복종적주체인 바틀비는 단조로운 필사 작업에 대한 의욕 상실과 무감각으로 몰락한다. 바틀비는 성과사회의 과도한 긍정성으로 타버린 성과주체와는 다르다.


7장 피로사회

사실 마지막 장은 좀 어려웠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내 나름대로 소화해 보았다.  현재의 성과사회, 활동과잉사회는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을 야기하는데 그 피로의 성격이 관계 파괴적이고 고립적이어서 그 대립자로서 공동체의 화해 무드의 피로를 제안하는 한트케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건강한 노동과 활동의 결과로써의 피로를 긍정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제안이라고 어렴풋이 이해했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p.72


첨부. 강연 원고 - 우울사회

후기 근대의 성과주체는 외부의 의무보다는 자신의 내부 욕구에 집중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그리고 명령하는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을 제공할 타자의 존재도 없어진다. 스스로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초자아는 긍정화를 통해 이상 자아가 되는데, 금지와 제한을 명령하며 자아 위에서 군립하는 억압적인 초자아와는 달리 이상 자아는 유혹을 통해 긍정적인 강제력을 발휘한다.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p.103-104




이 책은 부정조차 할 수 없는 과도한 긍정이 요구되는 현대사회에서 자발적인 활동 과잉으로 지쳐버리는 현대인들의 피로를 설명하고 만연하는 우울증이 자기 착취의 결과임을 주장하고 있다. 성과주의 현대사회는 비어있는 여유와 사색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이는 오히려 규율사회에서 벗어난 주체들이 자신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상을 이룰 수 있다는 이 환상은 '이룰 수 있음에도' 이루지 못한 현실의 자아를 괴롭혀서 우울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현대사회의 피로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이 책은 다시 읽어도 그 꿰뚫어 보는 시각이 놀랍고 공감된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ebs 다큐로 방영이 되었던 산골에 들어가 집을 짓고 기술에서 벗어나 자급자족으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하얼과 페달,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문명과 기술을 거부하는 인터뷰 내용 - 사실은 기술이 있기에 그들의 삶이 유지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것이 있음에 - 때문에 비난도 많은 것 같긴 하지만, 복잡도와 시스템 의존도가 높은 자본주의 소비주의 사회로부터 회귀해서 자연에 가깝게 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간다.


무한 긍정이 지배하고 무한 긍정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 자극, 정보, 충동, 그로 인한 활동 모든 것이 과잉인 세계에서 나는 사유와 사색을 통해 나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탈진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버티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뭘 위해서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해야만 하는 것이 강제되는 규율 사회를 졸업한 탓이겠지.


세상의 이치를 일부 이해했다는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고 세상을 사는 이 피곤함이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쬐끔은 위로가 되는 책. 한번쯤 읽어보면 좋은 책이다. 충분히 이해하기는 시간이 많이 들지만 ㅋㅋ 두 번째 읽을 때 보니 첫 번째 읽었을 때 내가 깊이 없이 얕게 읽었다는 생각이.


(휴,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21세기 자본을 읽고 있는데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간다 -_- 너무 두꺼워서 진도가 나가는 게 실감도 안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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