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
온라인서점에서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사는 법"을 장바구니에 담으면서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가 눈에 들어왔다. 오랫만에 에쿠니 가오리 책을 읽어보고 싶기도 하고, 에쿠니 가오리니까 실망하더라도 완전 별로인 책은 아닐 꺼 같고, 제목도 맘에 들고. 해서 책을 골라봤다.
책의 제목인,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는 책의 주인공 세 자매의 아버지가 손수 써서 액자로 만든 가훈이다.
이누야마 집안에는 가훈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그 때를 모르니 전전긍긍하지 말고 마음껏 즐겁게 살자.
- 제 1장 중에서
연애 결혼해서 사랑하는 남편과 그림 같이 살고 있는 우아한 첫째 언니 아사코, 낭만 연애주의자이며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인 둘째 하루코,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고 있지만 자신만의 가정에서 현모양처가 되고 싶은 막내 이쿠코가 주인공 세 자매이다. 우애가 좋은 세 자매는 가훈처럼 씩씩하고 솔직하게 스스로의 감정에도, 다가온 현실에도 대처한다. 씩씩하고 솔직한 것이 타인에게도 선한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에게는 그것은 언제나 옳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책임을 진다.
술집 카운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을 때, 하루코는 구마키를 착해 보이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착한 남자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확인해보고 싶다.
하루코의 연애는 늘 그렇게 시작된다. 구마키는 일 때문에 그곳에 와 있고, 동행은 없다고 했다. 하루코는 그렇다면 오늘 밤 관계를 갖는 것은 간단하겠다고 계산했다. 하루코는 연애의 시작에는 언제나 적극적이다.
그 결과, 거의 수입이 없는 남자가 굴러들게 되었다. 구마키는 더 없이 착했다. 하우코가 미처 계산하지 못했을 정도로 착했다.
- 제 1장 중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재지 않는다.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러고 보면 에쿠니 가오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느긋한 편이고, 소소하고 느릿한 일상의 풍경과 감정에 대한 묘사는 열심히지만, 치열하게 사는 삶에 대한 묘사는 별로 못 본 것 같다. 상황을 재단하고, 장단점을 비교하고, 치밀하게 설계하는 주인공이 거의 없다. 내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일지도.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해 가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아사코 인상에는 '음울한', 하루코 인상에는 '그런대로 쾌적한', 그리고 이쿠코 인상에는 '마음에 드는 장화를 여러 번 신을 수 있어서 좋았던' 가을이었다.
- 제 14장 중에서
밖에 나가지만 않으면, 구니카즈 외의 인간과 관계하지 않으면, 집안일에 미비한 점만 없으면, 구니카즈만 보고 있으면, 그리고 구니카즈의 기분을 자칫 잘못 받아들이지만 않으면, 구니카즈는 정말 관대하고 아사코를 소중하게 다뤄준다.
나는 대체 왜 가출 따위를 한 것일까
- 제 22장 중에서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평이하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는데, 곱씹을 수록 주인공 자매가 맘에 든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해도, 처음부터 엇나간 것처럼 보여도, 실패를 단번에 극복하지 못해도, 한번에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다시 또 다시 바닥을 차고 올라온다. 세 자매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챙겨주고 의지하면서.
건강함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