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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콜요청금지 Apr 18. 2017

행운에 속지 마라

나심 니콜라스 탈렙

한 반에 생일이 같은 학생이 존재할 확률은?


한 반에 40명의 학생이 있을 때, 생일이 같은 학생이 존재할 확률은 88.4%이다. 한 반에 23명만 되어도 생일이 같은 학생이 존재할 확률은 50% 가 넘는다.


확률과 통계 수업 시간이었을까, 아님 그 이전이었을까, 아무튼 이 숫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아니 지금도 다시 생각해도 매번 놀랍다. 한 반에 1년에 365일이나 존재하는 생일 날짜가 똑같은 두명의 학생이 있다는 것이 털 끝만큼도 놀랍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이.


내 짝꿍이 나와 생일이 같을 확률은 1/365이고,

나와 생일이 같은 학생이 1명 이상 존재할 확률은

 1/365 (1명이 나와 같은 생일일 확률)  x 39 (40명 중에 나를 제외한 39명 중에 아무나 존재하면 되므로 39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 약 10%이다. 비교적 일어나기 어려운 사건의 확률이다.


하지만 우리 반에서 나와 같은 생일인 친구를 만날 확률은 열 번 중에 한 번이지만,

우리 반에서 아무나 생일이 같은 확률은 열 번 중에 아홉 번이나 된다.

어떤 일이 나에게 벌어질 확률은 고작 10%지만, 누군가가 겪을 확률은 90% 라는 것이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높은 확률로 겪게 될 일.


너무나도 일어나기 어려워서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일.

블랙스완. 상상 속의 검은 백조. 하지만 신대륙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되어버린, 발생 확률이 희박해서 대비하지 못했지만 정말로 발생해버린 그런 일을 일컫는 말이다.


이 책은 '블랙스완'이라는 책으로 2008년 세계경제를 뒤흔든 미국발 금융위기를 예측했던 저자가 그보다 먼저 출판했던 '행운에 속지 마라'는 책이다. '블랙스완'은 읽지 않았지만 두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대체로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날 확률의 숫자의 크기로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책에서  '행운과 불운'으로 언급하는 것과 대비되어 '이것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다'는 저자의 주장에서의 '확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책을 읽는 내내 아리송했지만, 최종적으로 내가 이해한 것은

확률적으로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나 또는 어떤 사람이 겪은 특정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를 행운 또는 불운이라고 일컫고, 결과론적으로 추리해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은 다행히 또는 불행히 그 일이 발생했다는 그 사실만을 증명할 뿐 그것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거나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

이며 이것은 확률에 의존해서 판단을 내리면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를 안게 되고 실제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발견한 "승자만 눈에 띄기 마련이고, 성공은 꽤나 운에 좌우되는 편이어서 각종 성공 스토리들은 성공된 표본에 대해서만 편향되어 있다"는 주장으로부터, 왜 그렇게 많은 자기개발서와 자서전, 위인전들이 거슬리는지 그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는 느낌이었다. 확률적으로 어떤 사건은 일어나기 마련인데, 발생해서 눈에 띈 것만을 가지고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요행을 바라지 말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리스크만 감수하면서 착실하게 사는 미덕을 주장하고 있는 책인데(저자가 희귀 사건에 베팅하는 옵션 트레이더인 것은 아이러니) 한편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러시안룰렛의 예는 '한 번만 실패해도 모든 것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로, '여러 번의 행운이 반복된다고 실력은 아니다'라는 말은 반대로 '나에게 있어 아직 증명되지 않은 실패'를 예언하는 것 같아서. 운에 대한 경각심을 갖자는 얘기인데 왜 내가 이룬 것들이 다 운이고 언젠가는 탄로가 날 것 같은 자격지심으로 귀결이 되는 걸까.


어쨌든 간에 저자는 운은 운으로 받아들여 인지할 수 있는 작은 확률의 행운에 베팅하거나 예상되는 불운의 크기가 내가 감수할 수 있는 것일 때에만 불운에 베팅하라고 당부하는 듯하다. 감수할 수 있을 한계만큼만 감수하면서 허락되는 최대한의 행운에 베팅해보자.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수도 있으니.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은 확률의 숫자가 다가 아니니까.




휴,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만 감수하라니, 이게 말이야 방귀야.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불확정성 덩어리인데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오늘도 책에선 내 미래를 건지지 못하였다. 맨날 이렇게 읽어재껴도 내가 찾는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넘버스 네 번째 모임에서 읽은 책.

http://trevari.co.kr/clubs/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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