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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콜요청금지 Jun 26. 2017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다혜

여성 독자들은 잘 이해한다. 많은 것들을 이해한다. 남성의 눈에 맞추어 괜찮은 여자가 되고자 노력하고, 남성이 욕망을 느끼는 패턴을 이해한다. 그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스쳐도 그냥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때리며 '널 때리는 나'에 눈물을 흘리면, 맞는 여자보다 때리는 남자의 '심적' 고통에 공감할 줄도 알게 된다. 영화 <LA 컨피센셜>을 보면서 러셀 크로가 킴 베이신저를 때릴 때 나도 가슴이 먹먹해지더라니까. 사랑하는 여자를 때리는 러셀 크로에 감정이입을 얼마나 제대로 했는지.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인가.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늘 피해자가 생각하는 것이다. 왜 가해자가 가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왜'라니. 마치 이유가 있으면 그래도 된다는 듯이.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는 남성 중심의 스토리텔링에 잘 길든 결과가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모든 소설과 영화에서 남성이 여성을 때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남자의 심리 쪽이다. 여자는 이해할 수 없으며 감정적이고 변덕이 죽 끓듯 한다고 말해왔다. 그런 이야기가 많다. 여자는 늘 갑자기 화를 내고 갑자기 사라지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여자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여성들의 많은 행동에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남성 중심의 서사는, 사실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니까.
나는 정말 잘 이해한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남성의 기록이었다. 내가 배운 모든 것은 남성의 역사였다. 이것을 이해하는 법을 진즉에 배우지 못했다면 벌써 사회에서 생존이 어려웠겠지. 하지만 그 결과. 여자다운 것이 남자에게 받아들여지는 틀 안에 있지 않다면 배척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
-p.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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