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에 비해서 단편은 별로 좋아하진 않는 편인데, 책이 생각보다 좋았다. 내가 경험한 하루키는 뭔가.. 단편소설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랑, 수필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외에는 맘에 드는 글이 없어서. 사실 별로 읽은 게 없기도 하지만.
맘에 들었던 단편 몇개의 구절들을 옮겨본다.
설령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 닥친다 해도 나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으니까. - <드라이브 마이 카> 중에서
첫번째로 수록된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 배우인 남자주인공이 운전을 하지 못하게 되어 한 여자 개인운전수를 고용하면서 주고받게 되는 대화의 이야기.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는 걸 안다면, 몰랐으면 몰랐지 이미 알아버린 다음에는 알고 싶어질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어 못견딜 것이다. 차라리 판도라의 상자의 존재 같은 거 몰랐으면 하는 것이다. 나쁜 뱀. 뱀이 신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이거나 내가 순진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 자신이 괴로움에 빠지고 싶지가 않다. 조금도. 난 그저 평화롭고 싶을 뿐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히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 <드라이브 마이 카> 중에서
주인공 남자가 아내를 잃고 아내와 잤던 남자들 중에 마지막 사람(-_-;;)과 친구가 되어 아내를 추억하는 말을 주고받는다. 죽은 아내를 모두 전부를 이해하기 위해, 그에겐 아무것도 모른 척 접근해서.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던 것이다.
타인을 전부 이해하려는 것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눈 앞의 장면을 같은 방향에서 함께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정말 같은 그림이 보이는지 그 중에 어떤 것이 그의 마음을 흔드는지 두 가지 다 증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나는 반대로.. 나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 나 자신의 마음은 정면으로 마주할 수가 없어서, 치우치지 않고는 스스로를 바라볼 수가 없어서, 내가 치우친 것인지 아닌지도 분명하지가 않아서. 내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지 모르겠어서 답답하다. 나를 이해하는 것과 남을 이해하는 것 중에 어느 게 먼저일까. 생각해보자면 그저 둘다 아주 조금씩 그렇게 나아가는 수 밖에 없겠지만서도.
조명을 받고 주어진 대사를 한다. 박수를 받고 막이 내려진다.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이전과 같은 장소가 아니다. - <드라이브 마이 카> 중에서
나는 오분 전의 나로도, 일분 전의 나로도 돌아갈 수가 없다. 언제나. 인터넷에서 xx를 보지 않은 눈을 삽니다 라고 우스갯 소리를 하듯이. 아무리 간절히 바란다한들 돌아갈 수 있는 그 곳은 더이상 만날 수 없는 사차원의 어느 지점이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이 필요 이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도 잘 분간이 안 간다는 겁니다. 그 경계를 잘 모르겠어요. - <독립기관> 중에서
항상 모르겠다. 시소의 중간 쯤에 잘 서있는 방법을. 사회적으로 제도와 사람들 사이에 살아있다는 그것은 어느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것의 가운데 쯤을 항상 유지해야 하는 일 같다.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일. 다들 어떻게 그렇게 살지. 나만 어렵나. 십년 쯤 머리를 맴도는 생각.
물론 자기모순이죠. 자기분열이예요. 나는 정반대의 것을 동시에 원하고 있어요. 아무리 노력해봤자 잘될 리가 없죠. - <독립기관> 중에서
혼자이고 싶지 않은데, 혼자서 잘하고 싶다. 혼자서 잘 하고 싶은데 혼자이고 싶지 않다.
언제까지고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일 못 만나게 된다면 그대로 세상이 끝나버릴 것만 같다. 그런 것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이상할 것도 특이할 것도 없는, 지극히 일반적인 인생의 한 컷이다. - <독립기관> 중에서
단편 중에 뒤에 있는 몇 편은 역시 난해하고, 역시 언젠가 그런 글을 본 후 하루키를 멀리하게 되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노르웨이의 숲 정도는 읽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