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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콜요청금지 Sep 06. 2015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충분히 오랜 시간 전에 이미 읽었어야 할 것만 같은 올드한 표지의 책, 상실의 시대를 오늘에야 읽었다. 30년 전이라고 해야할까 45년 전이라고 해야할까, 1970년대 대학생의 이야기.


오늘 만난 두 명의 친구에게 이 책을 읽고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다들 당연히 오래전에 이미 읽었던 거였어 ㅠ 이로써 대학 때 몇 번이나 (스스로 혹은 타의로) 읽었던 단편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와, 몇 개의 수필을 제외하고... <여자 없는 남자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에 이어 4번째로 '제대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이 되었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까.


와타나베는 나였고, 동시에 기즈키도 나였고, 미도리도 나오코도 레이코도 나였다. 그렇게 누구든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이야기였기에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그리고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겠지만, 내가 그렇게 뻔한 사람이고 내 감정들이 다 흔해빠진 것들이었나 실망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를 다 들켜버린 것 같아서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소설을 읽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게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전혀 몰랐다가 최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ㅡㅡ;) 이 책은 연애 소설이었으며, 황홀한 사랑을 하면서도 상실감과 슬픔에 사로잡힌 젊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희미하게 기억되는 젊음의 단편을 떠올리는 이야기이다. 모든 슬픔은 시간이 가면 옅어져서 언젠가는 희미해진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하지만 그 언젠가가 될 때까지 다른 슬픔이 찾아오지 않는다거나, 그동안 꾹 참고 버틸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일 것 같다.


언제나처럼 기억에 남았던 구절들을 옮겨보고 싶은데, 이러다 책을 통째로 베껴 쓰겠다.. -_- 특히 내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비슷하게 말하거나 생각한 적이 있는 것 같은 말들. 슬퍼진다.


"어깨의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그런 말은 해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알겠어? 만약 내가 지금 어깨 힘을 뺀다면 나는 산산조각이 나버린단 말이야. 난 옛날부터 이런 식으로만 살아왔고, 지금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 한번 힘을 빼고 나면 다신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난 산산조각이 나서― 어딘가로 날려가 버리고 말 거야. 어째서 그런 걸 모르는 거야?" - by 나오코
"하지만 아무튼 나는 나 자신이 네게 공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너를 무척이나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상처받게 했으리라 생각해. 하지만 그로 인해 나 역시 나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으며, 상처를 입혔어. 변명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변호를 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아. 만일 내가 네  마음속에 어떤 상처를 남겼다면, 그것은 너만의 상처가 아닌 나의 상처이기도 해. 그러니까 그 일로 나를 미워하거나 하진 말아줘.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야. 난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한 인간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게서 미움을 받고 싶지 않은 거야. 네게 미움을 받거나 한다면, 나는 정말 산산조각 나버릴 거야.
(... 중략) 하지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진 말아줘. 나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나에 대한 네 호의를 느꼈으며,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그래서 그 심정을 솔직하게 네게 전하고 있을 뿐이야. 아마도 지금의 나는 그런 호의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아." - by 나오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아. 난 뭐든지 서툴러서." - by 나오코
"이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이상해지면, 말하자면 나사가 풀리기 시작하면 금방 그걸 알아차리고 주의 깊게 인내심을 갖고 고쳐줄 것이다. ― 나사를 조여주고, 엉킨 실을 풀어주겠지  ―라는 신뢰감만 있으면 우리 같은 병은 재발되지 않는 거야." - by 레이코
"그 사람은 자기와 있을 땐 언제나 그랬어. 자신의 약한 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 자기를 아주 좋아했던 것 같아, 그 사람. 그래서 자신의 좋은 면만 보이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어. 어깨 힘을 좀 빼고 있었다고나 할까. 사실은 성격이 변덕스러운 편이었거든. (... 중략) 늘 자신을 바꾸려고 향상시키려고 애썼는데, 그게 잘 안되면 짜증을 내거나 슬퍼했어. 몹시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 있었는데,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해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바꿔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 불쌍한 기즈키." - by 나오코의 기즈키 이야기
"나와 와타나베는 닮은 데가 있어." 하고 나가사와 선배가 말했다. "와타나베도 나처럼 본질적으로는 자신에게만 흥미를 느끼는 인간이야. 오만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 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야.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그런 것밖에는 흥미를 가지지 못해. - by 나가사와의 와타나베 이야기
목련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오는 옅은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까닭 없이 부풀어 오르고, 떨리고, 흔들리고, 아픔으로 차올랐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오랜 시간이 걸려 그 느낌들은 지나갔고, 그 후에는 둔탁한 아픔을 남겨놓았다. - by 와타나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난 그걸 알아요. 그건 한 번 왔다 가버린 거예요. 그런 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 by 나오코


그 밖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와타나베가 사랑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나오코는 나를 사랑한 건지, 뒷 이야기는 더 어떻게 이어졌을지.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와타나베는 그리고 계속 살았을까. 하루키는 혹시 정말 이런 일들을 겪고 살아낸 걸까.


외롭거나 허무하거나 쓸쓸하거나 시린 감정이 있는 사람들은 읽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2 권이 책상 위에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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