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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콜요청금지 Nov 15. 2015

장미 비파 레몬

에쿠니 가오리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


스무 살 때 처음 읽은 <냉정과 열정  사이>는 지금의 나의 (일본 소설에 치우친) 독서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지배하고 있다. 처음 읽었던 일본 소설은 고등학생 때 엄마가 사줬던 <설국>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땐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도 에쿠니 가오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에쿠니 가오리의 몇몇 자전적 소설들을 읽으면, (자전적 소설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본 것은 아니지만 반복되는 여주인공의 습관과 말투를 보면 도저히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목욕과 산책과 차나 와인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시크한 말투의 고독한 여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사랑에 빠지거나 헤어지고, 고독을 씹고, 외로움을 타고 외로움을 즐기고.. 의 반복. 그것에 지루해져 일본 소설을 읽기 전에도 좋아했던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장르 문학으로 넘어간 이후 거의 읽지 않던 에쿠니 가오리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어쩌다 보니 두 권이 되어 책장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길래 꺼내었다가 다시 읽게 된 <장미 비파 레몬>. 2008년에 국내에 출판된 책이니 아마 읽은 지 6-7년은 지났나 보다. 더 이상 에쿠니 가오리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내용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그저 그렇게 읽고 말았던 책이었는데 오랜만에 읽은 이 책은 왜 또 다르게 다가오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 오래된 결혼과 연애 이야기에 더 공감하게 된 까닭일까.


세 명의 여자 친구들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남편과 가족, 주변 인물들의 모순된 아니러니 사랑이야기. 이야기의 시작에 다섯 쌍의 부부와 4명의 싱글 여자는, 두 커플이 이혼을 하고 한 커플이 만났다 헤어지고 또 다른 한 커플이 헤어지고 새로운 두 커플이 생기고 또 다른 한 커플을 예고하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연애 이야기지만 어찌 보면 엄청나게 시니컬한 비극 소설. 같은 순간 같은 장소에서 딴 생각을 하는 커플, 그리고 같은 사건에 대해 반대로 느끼는 커플들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한 사건에 연애 감정을 반복하는 순간들, 시작해봤자 똑같아질 거라고 비극을 예견하는 결말.


아야는 딱히 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비교적 자주-어느 정도 빈도 라야 자주라고 할 수 있는지 실은 잘 모르겠지만-꽃을 사는 것은 남편에 대한 빈정거림 또는 심술이었다.


아야는 일요일이 싫었다. (중략) 신이치는 집 안에서는 마치 다 큰 어린애 같다. (중략) 오후, 한 시간 동안 신이치를 밖으로 쫓아내고 유이치에게는 텔레비전 게임을  해도 된다고 허락한다. 그제야 겨우 아야는 방 청소를 할 수 있다.

(중략) 신이치는 자신이 아주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불쾌했다. 참 내, 왜 일요일마다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츠치야 다모츠는 조그만 커피 잔을 입술에서 떼면서 카푸치노에 섞는 우유는 왜 이렇게 늘 묽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에리는 지금처럼 미간을 찌푸린 츠치야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도우코는 생각한다. 나는 위험한 다리를 건넌 적도 없고, 애당초 건널 생각도 없다. (중략) 도우코는 자신의 남편을 마치 남 보듯 바라보면서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위험한 다리가 아니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신기하리만큼 냉정하게.


"참 이상하지."
소우코의 거북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치코는 말했다.
"다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못하는 것 같아."
"네?"
폭탄 발언이었다.
"그대로 세월이 흐르고 나서는 오래도록 함께한 사람을 가장 사랑했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아마."


"야마기시 선생님, 에너지가 없대요."
소우코가 말했다.
"뭐?"
"선생님이 전에 내게 그랬어요. 자신에게는 여자들 같은, 연애에 대한 강렬한 에너지가 없다고."
마리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
에너지가 있어서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가 에너지를 낳는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중략) 진료실에서 오후의 홍차를 마시면서 야마기시는 마리에의 편지에 대해 생각했다. 반듯한 글씨로 쓴 편지였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의지는 분명한.
문제는 마리에가 아니었다. (중략) 마리에와 여유롭게 얘기를 나누고 싶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었다.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인 연애와 그 순간이 아니게 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연애.


연애를 하고 있고, 연애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까지고.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인생에서 그것만이 또렷하다고.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나의 존재를 밝혀야 한다고. 혼자도 빛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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