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보내는 편지 3
아빠. 오늘은 과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 우리 집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야 한다면 난 '과일계의 얼리어댑터'라는 구를 고를래. 그렇게 된 데는 아빠의 역할이 좀 컸지. 제철이 다가오기 두세 달 전부터 아빠는 그 과일을 사 오니까. 앨범을 보니까 올해 처음 먹은 수박은 5월 산이었더라. 5월이면 아직 봄이고, 여름은커녕 서늘한 기운이 바람에 얼핏 묻어있을 때일 텐데. 덕분에 나는 아빠가 사 오는 과일로 계절이 오고 감을 실감해. 이런 거지, 아빠가 사 오는 대저토마토는 봄의 예고편이랄까.
이것도 아빠 덕분인데 과일을 주제로 한 빙고 게임을 하면 그 판의 승자는 분명 나일 거야. 빙고 게임의 핵심은 다른 사람이 말할 법한 것과 나만 알 법한 것을 반반씩 섞는 것인데, 나는 신기한 과일과 그 맛을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어. 리치와 람부탄, 용안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망고와 망고스틴은 그렇게 다른데도 '망고'라는 돌림자를 함께 쓰는 건지. 사소하지만 알고 있어 뿌듯하고 달달한 이런 지식들도.
망고 하니까 생각난다. 한동안 아빠가 망고를 계-속 사 올 때, 할머니가 "난 사실 망고가 싫다."는 충격 선언을 하신 거. 할머니는 망고가 싫었던 게 아니라 그냥 그만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엄마한테는 이런 이야기도 들었어. 신혼 때라고 했던가. 쌀 살 돈도 없던 시절에 아빠가 망고를 사 와서 무척이나 당황했다고. 이런 건 양쪽에서 팩트체크해야 하는 거니까 반쯤만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거 진짜야 아빠?
오빠 말로는 우리 집 냉장고가 과일 무한리필이라고 하던데 정말 맞는 것 같아. 같은 복숭아, 같은 딸기라도 품종에 따라 나오는 시기도 맛도 무척 다르잖아. 올해 내가 먹는 복숭아는 안이 흰 것부터 노란 것까지, 겉이 보송한 것에서 매끈한 것까지, 단단한 것에서 말랑한 것까지. 정말 다채로웠던 것 같아.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올해 처음 먹어본 신비 복숭아였어.
(얼마 안 되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을 통틀어서 인상 깊은 과일을 하나 꼽는다면 난 중국귤을 꼽겠어. 나 어렸을 적에 아빠가 중국 출장 갔다가 오는 길에 캐리어에 몰래 중국 귤 서너 개를 숨겨왔던 거. 기억나? 호텔 조식으로 나온 것이라고 했었나. 잠이 덜 깬 채로 눈을 비비면서 아빠한테 다가갔더니 내 입에 귤 하나를 까 넣어줬던 것 같아. 한국의 것과는 사뭇 다른 압도적인 단맛에 눈이 번쩍 떠졌어. 그 맛이 내내 그리워서 중국에 가면 꼭 시장에 가 귤 한 봉지를 사서 먹곤 했는데, 어떤 귤도 첫맛에 비할 바는 못되더라.
아빤 여태껏 먹은 과일 중에 어떤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으려나. 문득 궁금해진다.
2021.9.26.
지금까지 만난 달콤함을 헤아리며,
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