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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그린 Jun 11. 2020

은유와 유추로 생각하기

예술경영 시리즈 1

은유는 풍선껌처럼 부풀어 오르는 유쾌한 즐거움이다. 이미지 출처 wallpaperaccess.com


1. 시골 우체부 마리오의 은유   


<씨네마천국>(1988), <인생은 아름다워>(1997), <일 포스티노>(1994)는 유럽 감성영화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의미와 사랑,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세 영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나 따사로운 햇볕 같은 테마음악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따스한 감성을 더욱 고조시켜준다.


이 중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 Il Postino>는 세계적인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 Neruda, 1904-1973)와 이탈리아 작은 섬의 우편배달부 마리오와의 우정을 그린 영화이다.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Beatrice)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마리오는 네루다의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를 통해 시와 예술, 그리고 사회를 자각한다는 내용이다. 단테의 문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베아트리체는 <신곡>의 주인공이자 천사같이 순수하고 숭고한 정신의 상징이다.

순진한 시골청년 마리오가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시를 쓰기 시작한다. 바로 은유(Metaphor)를 통해서 말이다.   


“왜 그러는가?”

“파블로 선생님.”

“우체통처럼 우둑커니 서있었잖나.”

“장승처럼요?”

“아니, 장기판 말처럼 요지부동이었어.”

“도자기 인형보다 조용했죠.”

“내 앞에서 은유와 직유를 사용하지 말게.”

“뭐라고 하셨죠?”

“은유 말이야!”

“그게 뭔데요?”

“은유? 은유란 뭐라고 설명할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것에 비유하는 거야.”  


시골청년 마리오에게 ‘은유’는 알 수 없는 단어였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말에서 은유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몰랐다. 은유, 즉 ‘메타포(Metaphor)’는 ‘~뒤의’, 또는 ‘~이후’, ‘~너머’라는 의미의 메타(Meta)와 ‘가져가다’라는 뜻의 페레인(Pherein)’이 합쳐져 메타페레인(Metepherein)에서 나왔다.

메타페레인은 ‘어떤 것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옮겨놓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시의 생명이 은유라고 처음 주장한 인물은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였다.


그는 플라톤이 추방한 시인(예술가)을 예술로 복귀시켰다. 플라톤은 시인, 즉 예술가가 이성이 아닌 감성적인 파토스(pathos)의 언어로 시를 쓰며 현실세계를 모방하고 있기에 인간 영혼이 진리인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보았고 이에 시를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감성적인 시가 나름의 합리적인 제작규칙에 의거할 수 있음을 설명하였고, 훌륭한 시를 지을 수 있는 조건으로 바로 이 은유의 능력을 꼽았다. 그는 이 은유를 ‘상이한 것들 가운데 유사함을 발견해내는 것’으로 보았다.     


종이비행기를 날리듯 하늘을 날고 싶은 생각이 실제 하늘을 날게 한다. 이미지 출처 wallpaperaccess.com


2. 예술, 은유의 유희   


우리는 이 ‘은유’를 너무나 잘 안다. 문학작품에서 수많은 은유적 표현에 대해 배웠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은유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에서 특히, 미술에서 이 은유를 발견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예술작품은 기본적으로 은유와 유추를 기반하고 있는데 말이다. 예술에서 은유가 아닌 것이 있는가? 현대미술의 개념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 은유, 상이한 것과 유사한 것들의 유희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다.


 다다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987-1968)의 <샘(Fountain)>(1917)은 친숙한 가정의 오브제인 소변기에서 샘을 발견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4년 영국 BBC는 뒤샹의 샘은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앤디워홀의 작품을 누르고 500명의 전문가들이 뽑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물론 뒤샹의 작품은 레디메이드, 아방가르드, 현실의 부조리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은유를 통한 유희라고 볼 수 있다. 은유는 본질적으로 둘 간의 유사성에 의해 성립된다. 즉, 예술 원리인 모방(미메시스) 개념과 유관하다는 말이다.


 은유는 또한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거울을 통하여 바라보는 것과 같다. 즉, 잘 알려진 것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용어이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 본대로 은유는 우리가 아는 것을 ‘저 너머(Meta)’의 모르는 것으로 ‘가져가는 것(Pherein)’을 의미한다. 이 은유가 성립되는 것은 두 사물 간의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간의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름’에서 ‘닮음’을 찾아내는 능력이 바로 은유이다.


 이 은유의 유사성을 잘 찾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이자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훌륭한 시인의 덕목을 은유의 발견 능력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은유는 근본적으로 예술가의 개인적 시각에 의한 허구적인 것으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하나의 사물을 정답이 아닌 ‘~처럼’ 보기 때문이다. 뒤샹이 변기를 샘으로 보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이러한 은유적 능력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이 은유가 바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상상력은 하나의 사물 안에 있는 은유적 의미와 더 깊은 곳에 있는 본질을 볼 수 있는 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씨앗을 보고 다 자란 나무를 상상하듯이 나무의 씨앗 안에 이미 완성된 존재인 나무의 형상이 깃들여져 있다고 보았다.


다만 씨앗이 아직 완전히 자란 나무의 형상으로 현실화되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이 씨앗처럼 그것을 보고도 나무를 그릴 수 있는 은유의 능력, 즉 상상력을 통해 나무를 그릴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완전한 상태의 모방, 미메시스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로 이미 세계에 형상화되어 있는 개별적인 은유가 바로 시인의 언어이자 예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은유는 기본적으로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 출처 wallpaperaccess.com


3. 은유와 유추를 통한 예술적 사고 기르기   


 다름과 닮음의 유사성을 통한 은유의 미메시스는 마찬가지로 유추(analogy)를 가능케 한다. 유추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은유로 기본적으로 논리적 구조를 중요시한다. 이는 어떤 사물들이 본질적으로 특정의 비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추정하는 것이다.

유추는 비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날로지아(analogiā)에서 유래한 말로 둘 혹은 그 이상의 현상이나 복잡한 현상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물이나 현상들에서 형상이나 비례를 유추하여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

모든 모방에는 은유와 유추가 기본이 된다. 다만, 특별한 상상력이 위대한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푸른 양들의 춤추는 구름의 유희를 발견한 아이에게 구름의 성분과 실체를 보여준다면 결코 마그리트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본만이 예술의 가치라고 한다면 끝없는 이미지를 찍어내는 공장을 만든 앤디워홀은 상업적인 인쇄소 사장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은유와 유추는 모든 가능성으로 향한 숨겨진 지름길이다. 상이한 것, 모르는 것에서 유사한 것,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이 예술적 상상력은 결코 정답들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아이에게 단지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 풀옵션 장난감만 선사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 은유와 유추의 창의력을 쉽게 발견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예술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수수께끼로부터, 궁금증으로부터 그리고 답답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은유와 유추를 통한 예술교육은 단지 문학적 수사학이 아닌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그 통찰력은 얇은 언어적 유희 저 너머에 있는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미학적 태도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하나의 답이 아닌 자신만의 사유를 통한 의미 있는 전혀 다른 발견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개인적이고 미학적인 발견이 바로 소소하지만 위대한 예술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베아트리체, 당신의 미소가 나비날개처럼 펼쳐집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베아트리체는 결국 마리오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글|그린룸


* 이 글은 필자가 2017 한국메세나협회 K옥션 아트챌린지 프로그램으로 연재하였던 칼럼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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