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칼리에서의 9박 10일
기적같았던 나의 살사 학원, San Antonio에 위치한 Arrebato Caleno(아레바토 깔레뇨).
안과 밖이 전부 새하얀 벽 위에 그려진 알록달록한 그림들, 윙윙 돌아가는 선풍기, 흥겹게 울려퍼지는 살사 음악,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검은 개 솜브라..
가장 좋은 건 이 살사 학원 안을 채우는 사람들이었다.
따뜻한 미소의 원장선생님 노라,
내 개인레슨 선생님이었던, 언제나 싱글벙글한 미소가 참 사랑스러웠던 스무 살 미겔,
누구보다 엄한 스타일이지만 열심히만 따라하며 배우면 싱긋 웃었던 또 다른 선생님 앙헬,
그리고 이 학원에 머물며 스스럼없이 이방인을 맞아주던, '춤'이라는 공통분모로 맺어져 있던 많은 자원봉사자들,
그 중에서도 한국인 주영씨. 강인하고 당당한 미소로 나 같은 초보 여행자도 힘을 내게 해 주었던, 그리고 정말 살사를 입이 떡 벌어지게 잘 췄던 주영씨.
이 곳의 주방에서 시원한 물 한잔, 아보카도 샐러드 한 접시 얻어먹었던
나른하고 시원하면서도 땀내나는 기억들.
살사 클럽 La Topa Tolondra.
수많은 깔레뇨들이 살사를 추기 위해 찾는 곳이다.
거의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은 상태로 갔어서, 춤은 거의 안 췄다.
다비드가 합기도 선생님으로 일하던 도장에 놀러 갔었다. (오죽 한가하고 할 일이 없었으면..)
머나먼 콜롬비아에서, 콜롬비아 국기와 나란히 걸린 태극기와
하나 둘 셋! 차렷! 하고 외치는 한국어 구령이 참 신기하고 반가웠었다.
결국 어느 날은 한번 나도 여기서 합기도 수업을 듣고 말았다.
그러고는 '언젠가는 꼭 태권도나 합기도 같은 무술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 솟아났었는데
뭐, 이제는 그런 의욕도 다 시들해졌다.
칼리의 또 다른 성당.
얼핏 보면 산 안토니오 성당이랑 비슷해 보이지만, 건물 자체는 여기가 더 컸다.
고딕 양식의 성당.
하지만 나는 이렇게 뾰족뾰족하고 커다란 성당보다는, 역시 아담하고 아늑한 산 안토니오 성당이 더 좋더라.
칼리의 길거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래도 이 벽화는 꼭 찍어두고 싶어서, 어서 한 장 찰칵 찍었다.
Persigue tus suenos. 너의 꿈을 좇아라.
그 옆의 그림은 체 게바라의 청년 시절 여행기를 다룬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의 한 장면인 듯 했다.
또 그 옆에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 라틴아메리카 만세! 라는 글씨와 함께.
아르헨티나 출신으로서 쿠바 혁명을 일으킨 체 게바라와, 멕시코시티 출신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콜롬비아에 그려져 있다.
다른 대륙과는 달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서로 국경을 초월해서 라틴아메리카의 공통된 정체성이나 연대감을 공유하는 듯했다. 한국에서 "아시아 만세!"를 외치는 그림을 본 적은 없으니.
라틴아메리카가 다 함께 똘똘 뭉쳐 서로를 형제처럼 여겨야 한다고 말하던 체 게바라의 염원이 그래도 이만하면 실현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은 다비드가 칼리 근처의 '강'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었다.
Rio, 그러니까 분명히 '강'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머릿속으로 우리나라 한강 같은, 폭이 상당히 넓고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할 수 있는 커다란 강을 상상하면서 따라갔는데, 강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아담하고 가파른 '계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 속으로 한참 들어가야 물을 볼 수 있었으니까.
여기에는 커다란 강이 없어서 이 정도 계곡도 '강'이라고 부르는 건지, 아니면 우리와 달리 강과 계곡과 개울 등등의 구분이 없어서 다 '강'으로 통틀어서 부르는 건지...
"왜 그래? 여기 강 맞아!"
그리고 못생긴 나.
"음, 아니야. 이건 강이 아니야."
다비드의 종아리에는 '백절불굴'이라는 문신이 있다. 태권도 정신을 새긴 거라고 했는데, 나는 첫날 이 문신을 보고서 다비드가 갱단/마약조직원인 줄 알았다. 오해해서 미안!
나는 키가 큰 편인데, 이 사진에서는 왜 이렇게 짜리몽땅해 보이는지.
그래도 귀여워 보이는 맛에 좋아하는 사진이다.
드디어 만난 '강'.
아무리 봐도 계곡이다. 계곡이지만... 콜롬비아 사람들이 '강'으로 부른다면 나도 '강'이라고 해 줘야지.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니까!
지금 생각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비빔밥!
카우치서핑 호스트인 알레한드로와 함께, 콜롬비아의 주방에서 한국의 비빔밥을 만들었던 특별한 기억이다.
정통 한국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최대한 구색을 갖춰 만들려는 알레한드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식 나물은 없지만, 달달 볶은 당근과 파프리카, 그리고 새싹채소를 넣어서 굉장히 알록달록한 비빔밥이 완성됐다.
고추장이 너무 귀해서, 각자 딱 필요한 만큼만 넣고 비벼 먹었었다.
코파아메리카 콜롬비아 대 칠레전이 있던 날이던가? 허름한 로컬 식당에서 별 기대 없이 시켜 먹은 코코넛 레모네이드였는데 기가 막히게 시원하고 맛있었다.
코코넛 레모네이드, 한국에 들여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외식문화가 참으로 열악하고 양심없는)한국에서는 저렇게 푸짐한 양이면 엄청나게 비싸게 팔겠지.
맛있는 코코넛 레모네이드와는 별개로 이 날 경기에서 콜롬비아는 졌다.
산 안토니오의 골목에는 은근히 예쁘고 조용한 식당들이 많아서, 매일 살사 레슨이 끝난 날이면 새로운 식당을 찾아 들어가 혼자서 진수성찬의 오찬을 즐기는 게 하루 일과가 됐었다.
싼 물가 덕분에, 항상 샐러드-메인요리-음료수까지 야무지게 시켜먹었었다.
사진은 Valle Pacifico라는, 상당히 고급진 씨푸드 레스토랑에서 나 혼자 먹은 점심.
송어(trucha)요리를 시켰는데, 맛있기는 하지만 계속 먹다보면 좀 질린다.
칼리에서의 마지막 날, 살사 레슨을 마치고 다시 찾은 산 안토니오 성당 앞에서.
열흘 동안 나의 가이드이자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 줬던 다비드하고도 작별을 할 시간이었다.
칼리에서 이피알레스(에콰도르 접경 지역 도시)로 가는 버스 시간이 임박했는데, 사실 다비드가 살짝 수다쟁이인데다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덕분에 버스터미널에 시간 맞춰서 도착하지 못할 뻔했다.
농담이고, 다비드, 정말 고마웠어.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칼리에서 더 많은 길거리 성추행을 당했을 거고, 어쩌면 강도를 당했을지도 몰라.
근데 나 이날 민낯에다가 춤추고 나서 땀에 절었었는데, 다시 사진으로 보니까 나름대로 귀엽네.
아디오스, 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