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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May 21. 2017

살사의 도시 칼리에서의 첫날

친절한 태권도 청년, 칼리의 첫 인상을 결정하다

비야데레이바에서 보고타로, 그리고 보고타에서 칼리로 긴긴 이동의 시간을 보냈다.

보고타에서 저녁 10시에 출발해서 약 10시간 후에 칼리에 도착했다. 이동 수단인 Bolivariano 장거리 버스는 콜롬비아 내에서 가장 큰 버스회사라고 들은 듯하다. 남미에 온 후 첫 번째 야간 장거리 버스 이동이었다.


칼리 혹은 깔리는, 살사의 도시라고 불린다.

살사의 발상지는 아니지만, (살사가 쿠바에서 유래했다는 등 발상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살사를 즐기는 사람이 매우 많고, 커다란 살사 페스티벌이 열리며, 깔레뇨들은 살사를 추는 일이 매우 자연스럽고 따라서 살사 학원도 많기에 세계 각국에서 칼리에 머물며 살사를 배우고자 하는 여행객들이 몰려든다. 그래서 나는 살사에서 열흘을 머물며 살사를 배워 볼 계획이었다. 


칼리에는 이미 나를 재워주기로 약속한 카우치서핑 호스트 알레한드로가 있었다. 

칼리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알레한드로네 집 주소로 이동! 


전날 밤에서 이 날 아침까지 버스에서 달려 알레한드로네 집에 방금 도착한 터라 살짝 잠이 부족해서 피곤했지만,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알레한드로 덕분에 그런 티를 낼 여유는 없었다. 

알레한드로가 내게 말했다.

 "곧 네게 이 동네를 가이드해줄 친구가 한 명 올 거야! 어마어마하게 태권도를 잘 하는 친구니까 둘이 잘 둘러보고 와.!

앗,

남자다. 콜롬비아 남자와 단둘이 동네 구경이라니... 그렇다면 지금의 이 후줄근한 꼴로 있을 수는 없지.

잽싸게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나와 보니 거실에 그 친구가 와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키가 크고 다부진 체격의 청년 다비드. 


나랑 살짝 어색하고 서먹한 첫 인사를 나눈 다비드는 나를 시장으로 데려갔다.  

칼리가 콜롬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고 들었는데, 그 명성에 비해서는 상당히 소박한 모습인 것 같았다. 

그래도 콜롬비아에서는 간혹 볼 수 있었던 편의점을 칼리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뭐 좀 먹을래?" 하며 다비드가 데려간 곳은 야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세비체를 먹을 수 있는 곳. 

사실 이날 전까지 세비체(ceviche)를 먹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대충 어떤 요리(생선회와 야채를 새콤한 소스에 버무린 요리)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이게 '야매' 세비체라는 건 딱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생새우와 케첩맛 나는 칠리소스를 버무린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허술한 맛은 허술한 맛대로 좋았다. 시장 음식 체험이니까. 

"가족은 몇 명이야? 몇 살이야?" 각자의 신상 조사(?)를 어색하게 해 가며 먹었던 새우 칵테일 세비체.


그 다음으로 다비드는 내게 '칼리에서 꼭 봐야할 곳'에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칼리는 날씨가 무지 덥다. 한낮에 햇볕이 그대로 정수리에 내리 꽂힌다.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지, 다비드는 나를 데리고 한참 언덕길을 올랐다. 

이 더운 날씨에, 갑자기 찾아든 손님을 위해서 언덕길을 올라야 한다니. 혹시 귀찮은 것은 아닐까? 혹시 주말에 일이 있는데도 일을 미뤄두고 나의 가이드가 되어줘야 해서 내키지 않는 것은 아닐까? 땀을 흘리며 헉헉대는 내내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다비드에게 계속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뭐 일 없어?" "오늘 바쁜 거 아냐?" "힘들지 않아?" 등등. (나는 진심으로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서 물어본 건데, 나중에 다비드와 이야기를 해 보니, 다비드는 내가 자꾸 이런 질문을 하길래 "얘가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도착한 곳은 칼리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인 산 안토니오 교회(교회라고는 하지만, 남미에서 교회는 아주아주 커다란 대성당을 제외한 모든 천주교 성당을 교회라고 부른다.), Iglesia de San Antonio였다. 하얀색의, 아담하고 어여쁜 교회. 

계단에 앉으면 칼리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한가로운 주말을 즐기는 칼리 사람들의 모습. 

좋은 건 크게 보자! 파노라마 샷으로 찍은 성당 앞의 광장. 

다비드와 처음으로 찍은 셀카. 내가 난데없이 들이댄 셀카봉에 다비드는 굉장히 수줍어했다. 카메라에서 웃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고 평소에 절대 하지 않는 짓이라던 다비드. 그래도 이 때는 웃었다 :)

나도 햇볕에 화장이 다 녹아서 이목구비가 참 수수해 보이네.. 입술에 뭐라도 바를걸 그랬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다비드가 나를 데려간 아이스크림(젤라또) 가게. 

보통 아이스크림 가게는 heladeria라고 하는데, 여기는 gelateria라고 하는 걸 봐서 젤라또 가게라고 하는 게 더 맞겠지..?

분홍빛 실내가 매우 예쁜, 그리고 정말 맛있고 (현지 물가로) 비싼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도 맛있는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듯했다. 정말 시원하고 달콤했던 시간.

중남미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특이한 맛들의 아이스크림과 만나게 된다. maracuya(패션후르트), guayaba(구아바) 등등. 아직도 혀 끝에 생각나는 그 상큼한 맛!

혹시 칼리에 가시는 분이라면, 칼리의 뜨거운 햇볕을 피해서 가 보시길. 가게 이름은 Fiore Gelateria. 

조금 더 걸으니 고양이 공원이 나왔다. 이 장소를 부르는 이름은 Parque de los gatos, El gato del rio, Gato de Tejada 등등 다양했다. 고양이 동상들이 각자 다른 무늬의 페인트칠, 각자 다른 이름과 의미를 갖고 모여 있던 곳. 나름대로 칼리의 명물인 듯했다.

공원 옆으로는 시원한 시냇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흘렀다. 


오늘 전혀 바쁘지 않다며, 아무런 볼일도 없다며 나를 부지런히 안내해주는 다비드와 함께 걷다가, 서다가, 이제는 제법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하며 칼리를 구경했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 있을까.

나라면, 갑자기 찾아온 외지의 손님에게 소중한 주말을 할애할 수 있을까. 

이 더운 날씨에 아무 불만도 내색하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쉬지 않고 우리 동네를 보여줄 수 있을까.

많은 반성이 되는 시간. 


마트에 들어가 무알콜 맥주 한 캔씩을 사서 나왔다.

시간이 지나니 미지근해서 매우 맛없어진 캔을 들고, 다비드는 또 어느 건물의 옥상 비슷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원래는 스페인어를 연습할 생각으로 다비드에게 스페인어로 계속 말을 걸었었지만, 나 스스로의 스페인어 실력이 너무 답답해서 결국에는 계속 영어로 대화를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화를 하면서, 다비드의 과거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 콜롬비아의 또다른 대도시 메데진(Medellin)에서 엘리트 스포츠 선수로서 태권도를 했었다고. 많은 한국인들을 만나고 자신의 사범님은 한국인이라고. 다른 직장에서 일을 했다가,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인 태권도를 하고 싶어서 지금은 그만 뒀다고. 

또 여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또 다른 공원과 도시의 전망. 

보고타보다 훨씬 도시의 느낌이 덜하고, 약간은 낙후된 느낌이었다. 내가 마음 속으로 상상했던 '뜨거운 열정의 살사의 도시'의 이미지와는 매우 달랐다. 


별 것 없는 풍경이지만 시민들이 나와서 저마다 저녁 바람에 땀을 식히려는지 광장에 나와 있다. 그러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가만히 앉아 있거나 옆사람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매일 서울의 바쁜 풍경을 보는 나에게는, 한국 사람들이 휴식이라고 해 봤자 휴식답지도 않은 휴식(어디 놀러와도 꼭 무언가 콘텐츠를 소비해야 하는, 하다 못해 셀카 한 장이라도 찍어야 하는)을 즐기는 것을 보는 나에게는 매우 낯선 풍경이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왠지 앞으로도 평생, 저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

왠지 평생, '1분도 쉬지 않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것 같다는 궁상맞은 예감이.

빨간 자동차를 이끌고 나온 귀여운 꼬마. 

매우 소박하고 사소하지만 또 누구에게는 삶인, 광장의 풍경.

왠지 보고타가 생각나 반가워서 찍어 본 길거리의 벽화. 저기 벽화 밑에 쓴 게 그래피티 작가의 아마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계정이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칼리의 첫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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