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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Dec 25. 2017

이슬라 네그라, 파블로 네루다의 집

시인의 집은 그의 시를 닮는다

발파라이소에서 꿀 같은 잠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발파라이소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바로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면서 그토록 그리던 파블로 네루다의 바닷가 집이 있는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로 가기 위해서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의 집에 찾아갈 거라는 생각에 너무 설레서, 집 근처 도서관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을 빌려 마음에 드는 시를 수첩에 매일 같이 필사하곤 했다. 

 <일 포스티노>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순박한 우편배달부 청년 마리오의 우정을 다룬 영화로, 영화 속 OST도 너무 좋아서 아직까지도 내 플레이리스트에 머물고 있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면 마치 이슬라 네그라가 이탈리아에 있는 한 작은 섬인 것으로 설정되어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슬라 네그라는 이탈리아가 아닌 칠레에 있으며, 또한 섬도 아니다. 다만 이슬라 네그라는 그 곳 지형이 마치 까만 섬처럼 보인다 하여 파블로 네루다가 직접 붙인 별칭이다. 

 이슬라 네그라에 꼭 가고 싶어서 열심히 네이버에서 '발파라이소에서 이슬라 네그라 가는 법'을 검색해 보았으나 애석하게도 마땅한 후기를 검색하지 못했다. 겨우 구글 검색을 통해 발파라이소에서 이슬라 네그라로 가는 교통편이 있음을 확인했다.


 발파라이소 버스 터미널의 아무 창구에나 가서 직원에게 "이슬라 네그라?" 하고 물으니 저어기 옆 창구로 가서 표를 사라고 알려준다. 배차 간격이 얼마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대략 1시간마다 버스가 있었을 것이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이슬라 네그라에 갈 계획이 있는 분들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이니 꼭 직접 버스터미널에서 확인하시길.


 불안한 마음으로 버스에 탑승했는데, 걱정할 건 없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일일이 승객들의 행선지를 확인하며, 한 시간여를 달려 이슬라 네그라에 도착하면 또한 아저씨가 알려주신다. (돌아올 때는 내려준 곳의 바로 반대편 자그마한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또 어이없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버스를 내려 5분여를 걸으면 파블로 네루다의 집이 나온다. 주변 환경이 매우 한적하고 아기자기한 게, 정말 예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Museo Pablo Neruda. 입장료가 붙어있다. 어른은 6000페소, 학생은 2000페소이다. 나는 원래 국제학생증이 있어서 할인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 여권/지갑 도난 사건 당시 당연히 학생증도 함께 도난됐기 때문에 6000페소나 내고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속이 쓰리다.


 안타깝게도 내부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입장을 하면 입장객 전원이 오디오 가이드를 지급받고, 순서에 따라 집을 관람하게 된다.

 파블로 네루다의 이슬라 네그라 집은 나의 상상 이상이었다. 역시 그가 가장 공을 들이고 가장 애정을 쏟았던 집 다웠다. <일 포스티노> 속 파블로 네루다의 집은 매우 소박한 모습이지만, 실제로 이 집은 규모가 상당하다.


 마치 여러 칸으로 된 듯한 기차, 혹은 바다를 항해중인 배에 올라탄 느낌을 주려는 듯, 세로로 길다란 모양의 이 집은 걸음을 옮기면서 각기 다른 느낌의 공간이 나타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파블로 네루다는 열혈 수집가였다. 사진을 찍지 못해 이 곳에 소개를 하지 못하는 것이 참 속상할 정도로, 그의 집은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특히 파블로 네루다는 바다나 항해에 관련된 물건이 관심이 많아서, 온갖 특이한 모양의 조개나, 배의 내부에나 있을 법한 물건이 많다.

 역시나 하이라이트는 파블로 네루다와 그의 아내 마틸데의 침실. 침실에 매우 커다란 창이 나 있고, 그 커다란 창 너머로 코 앞에 있는 바다가 사나운 파도를 으르렁대며 밀려온다. 그 시원한 파도 소리가 고스란히 눈 앞에 펼쳐지는 침실이라니. 바다를 연인의 침실로 가져오는 로맨틱한 생각은, 정말로 시인다운 발상이라고 느꼈다.

 침실 뿐만이 아니라 이 집의 구조, 장식품 등 모든 것이, 시인다운 상상력과 낭만으로 가득하다. 

 이 집이 한 편의 시와 같다고,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아쉬운 대로 집의 외관과 주변 풍경들을 실컷 카메라에 담는다. 

이렇게 바깥에서나마 그의 수집품 컬렉션을 살짝 보여줄 수 있다.

외벽에 붙은 물고기를 형상화한 자갈 장식만 봐도 그가 얼마나 '바다'라는 주제에 매료됐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집 앞에서 보이는 바다. 

해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열을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신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Pablo Neruda, <Poesia(시)>

Desnuda eres azul como la noche en Cuba: 

(벌거숭이, 그대는 쿠바의 밤처럼 푸르릅니다)
tienes enredaderas y estrellas en el pelo.

(당신의 머리카락에는 덩굴과 별들이 있습니다)
Desnuda eres redonda y amarilla

(벌거숭이, 당신은 넓다랗고 황금빛입니다)
como el verano en una iglesia de oro.

(마치 금으로 된 교회의 여름처럼)

                                                           -파블로 네루다, <Sonnet XXVII> 중

도난 사건 때 셀카봉도 함께 없어졌고, 아직 새 셀카봉을 사지 못해서 이 날은 전부 근접 사진이다. 

나무에 뭔가 쓰여 있다. 파블로 네루다가 새긴 그의 말이다.

"Regresé de mis viajes. 

Navegué construyendo la alegría."

"여행에서 돌아왔노라.

행복을 지으며 항해했노라."


 배낭여행자의 행복감을 제대로 자극했던 이 말. 실제로 이 말을 구글에서 찾아보니 많은 여행자들이 이 문구를 자신의 모토로 삼고 있었다. 

 항해를 하면서 행복을 지어올렸다니. 여행이 끝난 지금 되돌아보니 참 맞는 말인 듯하다. 이곳 저곳을 누비면서 내 안에 쌓아올린 것은 행복이었다.

집 관람을 마치고, 입장할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이 식당에 들어왔다.

파블로 네루다 박물관에 딸려 있는 식당으로, 이 곳에서 밥을 먹으면 너무나 운치 있을 것 같아서 꼭 이 곳에서 식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치 서초 예술의 전당 내부에 있는 근사한 식당이 가격대가 꽤 나가듯, 당연히 이 곳도 약간은 음식이 비싸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이 멋진 곳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해산물로 만든 각종 메뉴의 이름이 파블로 네루다가 지은 시의 제목을 따서 지은 것도 재미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


 다시 기분 좋게 발파라이소로 돌아가 어제 못한 발파라이소 구경을 마저 하려는데, 여기서 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 버렸다. 아까 버스를 내린 곳으로 다시 돌아가 발파라이소 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내가 너무나 당당하게 '산티아고 행 버스'에 올라타버린 것이 아닌가.

 버스를 타고 나서도 "어, 뭔가 이상한데?"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발파라이소가 아닌 산티아고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었다. 이렇게 발파라이소를 좀 더 본 후에 느지막하게 산티아고로 돌아가겠다는 내 계획은 전부 틀어지고 나는 결국 생각보다 일찍 산티아고로 귀가(?)하게 됐다. 아, 너무나도 아쉬운 발파라이소여 안녕. 다시는 널 찾아갈 수 없는 걸까? 


 그래도 전화위복이라고, 산티아고에 일찍 온 덕분에 나는 그 전날 골머리를 앓게 했던 곤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지갑을 분실하면서 나는 신용카드가 한 개도 없는 상태가 됐기 때문에 내가 직접 카드로 다음 행선지 비행기표를 살 수 없게 됐는데,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부탁해서 Sky airline(스카이 에어라인-칠레 국내 노선을 담당하는 저가항공사)으로 푸에르토 몬트(Puerto Montt)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려고 애썼지만 그놈의 현대카드 안심클릭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결국 내가 현금으로 비행기표를 직접 구매하는 방법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는데, 당일날 공항에서 직접 티켓을 사자니 왠지 자리가 없을까봐 불안했다.


 다행히도 구글맵을 찾아보니 산티아고에 스카이 에어라인 사무실이 있었고, 용케도 사무실에 찾아가서 생애 최초로 현금을 주고 비행기표를 살 수 있었다. 구글맵에 간판 사진이라든지 아무런 사진 정보가 없어서 찾아가면서도 여기가 맞을까 긴가민가했는데, 어찌나 안심되던지. 혹시나 나처럼 절박한 여행객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나는 구글맵에 바로 이 간판 사진을 업로드했다. 그 이후로 종종 "회원님이 올린 사진 조회수가 몇천을 돌파했습니다!" 하고 구글에서 알림이 올 때마다, 역시 내가 올린 사진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참 뿌듯하다.  

기왕 산티아고에 온 거, 산티아고의 저녁 분위기를 좀 더 느끼려고 돌아다녀 보았다. 

이 Y자로 갈라지는 길은 'Nueva York', 즉 '뉴욕'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뉴욕의 거리를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밤이 되어 도시 곳곳에 노오란 조명이 켜지니 더 예쁘다. 

 나를 이틀 밤 동안 머물게 해준 까롤라의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이 날 들었다. 어쩐지, 까롤라 표정이 많이 어두워 보이더니. 돌아오는 길에 꽃을 파는 리어카 아주머니로부터 까롤라에게 줄 작은 꽃다발을 샀다. 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잘 전달됐을지 모르겠다. 


 이제 다음날 아침이면, 산티아고를 떠나 더 먼 남쪽의 푸에르토 몬트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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